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문병란 시인 / 시인(詩人)의 간(肝)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4.

문병란 시인 / 시인(詩人)의 간(肝)

 

 

독수리가 파먹다 남은

프로메테우스의 간,

용궁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한점 토끼의 간,

빛나는 식칼은 목마르다.

 

어쩌다 쇠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모진 형벌,

천번 죽는 사나이가

모질게 최후의 간을 지키고 있다.

 

제 꾀에 속아

용궁 제3별관에 감금당한 토끼,

간을 둘러싸고 흥정이 한창인데

시인아, 너의 간은 어디다 감춰두었느냐.

 

벌겋게 불 단 적쇠 우에

한점 살코기는 지글지글 타고 있다

오 이 잔인한 사육제,

도마 위에 놓여 있는 식칼은

퍼어렇게 날세워 빛나고 있다.

 

오늘 누가 내게 간을 요구하는가

사방이 막힌 땅에 서서

오로지 지켜온 나의 간,

코카서스 산중으로 갈거나

바닷속 용궁으로 갈거나.

 

독수리야 독수리야

너를 위하여

너의 날카론 부리를 위하여

모질게 지켜온 한점 간,

오늘은 쪼아 먹으려무나

시름없이 쪼아 먹으려무나.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문병란 시인 / 아버지의 귀로(歸路)

 

 

서천(西天)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귀로(歸路)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에도

부드러운 석양(夕陽)의 입김이 어리우고,

상사(上司)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딸 앞에선

그 어느 대통령(大統領)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왕국(王國)

주류(主流)와 비주류(非主流)

여당(與黨)과 야당(野黨)도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

 

한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 노을!

 

무너져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 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정당성》 1973

 

 


 

문병란(文炳蘭, 1935년~2015년) 시인

전라남도 화순 출생. 호는 서은(瑞隱). 1961년에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 1962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이 3회 추천 완료하여 문단에 나옴. 1988년에 조선대학교 국문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가 2000년에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 명예교수.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6년 5.18기념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1979년 전남문학상을 시작으로 하여 요산문학상, 금호예술상, 광주문화예술상, 한림문학상, 박인환 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