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시인 / 안경을 닦으며
오늘은 아침부터 시야(視野)가 흐리다. 흐린 시야(視野)를 회복할 양으로 안경을 닦는다.
아무 소용이 없다.
실은 안경이 흐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온통 먼지투성인 것을 새삼 깨닫는 지명(知命)의 아침이여.
내 어릴 적 제천 어느 두메에서 만난 사슴의 해맑은 눈동자 그 눈동자를 닮은 우리의 어린 것들만은 그래도 밝은 아침을 맞아야 할 텐데.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연륜(年輪)
사람이 나이 들면 믿음이 가듯 저 숱한 나무들도 그 연륜(年輪)에 따라 믿음이 간다.
어느 봄날 아무 준비도 없이 앞뜰의 나뭇가지들을 치려다 왈칵 몰려드는 어떤 두려움으로 하여 나는 손 한번 대지 못하고 사닥다리를 내려온다.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황명 시인 / 탑(塔)
언젠가는 한번 크게 울릴 종이 되어라.
맨 처음 비롯할 때 너는 숫된 꽃망울 같은 어쩌면 휘날리는 꽃잎 같은 그런 무게로 있었을 게다.
그러다 보면 굳은 땅에 물 고이듯 비는 오고, 때로는 한빛 하야니 눈은 내리고
흩어지는 발자욱 같은 시공(時空) 속에서
너의 콧수염은 자라서 뉘우침의 제목(題目)을 키우고
그런 제목(題目)들은 쌓여서 마침내 침묵의 불만을 배우고,
그래서 오늘 너는 눈물의 해일(海溢)과 바위의 저력(底力)으로 무수한 소리 소리를 나에게 그리도 간절히 울먹이고 있음은
도시 나로 하여 어찌 하라는 말이냐 탑이여.
날아라 아침의 새들이여, 예전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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