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시인 / 시인(詩人)의 간(肝)
독수리가 파먹다 남은 프로메테우스의 간, 용궁의 도마 위에 올려놓은 한점 토끼의 간, 빛나는 식칼은 목마르다.
어쩌다 쇠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의 모진 형벌, 천번 죽는 사나이가 모질게 최후의 간을 지키고 있다.
제 꾀에 속아 용궁 제3별관에 감금당한 토끼, 간을 둘러싸고 흥정이 한창인데 시인아, 너의 간은 어디다 감춰두었느냐.
벌겋게 불 단 적쇠 우에 한점 살코기는 지글지글 타고 있다 오 이 잔인한 사육제, 도마 위에 놓여 있는 식칼은 퍼어렇게 날세워 빛나고 있다.
오늘 누가 내게 간을 요구하는가 사방이 막힌 땅에 서서 오로지 지켜온 나의 간, 코카서스 산중으로 갈거나 바닷속 용궁으로 갈거나.
독수리야 독수리야 너를 위하여 너의 날카론 부리를 위하여 모질게 지켜온 한점 간, 오늘은 쪼아 먹으려무나 시름없이 쪼아 먹으려무나.
땅의 연가, 창작과비평사, 1981
문병란 시인 / 아버지의 귀로(歸路)
서천(西天)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귀로(歸路)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에도 부드러운 석양(夕陽)의 입김이 어리우고, 상사(上司)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딸 앞에선 그 어느 대통령(大統領)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왕국(王國) 주류(主流)와 비주류(非主流) 여당(與黨)과 야당(野黨)도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
한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 노을!
무너져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 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정당성》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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