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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수연 시인 / 쥐와 굴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2.

배수연 시인 / 쥐와 굴

 

 

쥐는 무릎을 만들고 있다

누가 시끄럽게 구는 게냐?

실링팬 아래에서 노인이 외칠 때

쥐는 앞니로 자기 무릎을 만들고 있다

 

노인이여, 당신만 주인이 아닙니다

집세를 안내는 나도 주인이라고요

티브이 소리나 좀 키워보시죠

 

쇠고리에 걸어 둘

한 솥 뼈만 남은 노인이여

공기처럼 소파 위에 얹어 놓은

무릎이여

 

내 부모 래리, 마리

 

그들은 회분홍 발목을 내주었지

나는 그 가는 발목에 뺨을 대고 눈꺼풀을 내렸다

바짝 선 내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가, 이제 수염을 편히 내리렴”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는 일

 

화면 속엔 바티칸의 검은 연기 피어오르고

“교황 선출이 불발되었습니다”(노인과가 쥐가 기침한다)

 

마침내 흰 연기와 쏟아지는 박수

상기된 추기경이 새 교황을 발표할 때

 

노인과 쥐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

 

쥐는 지난주 먹은 굴을 생각한다

노인, 부엌에서 먹은

그 멋진 굴과 당신과 나,

 

이윽고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다면

우리가 천사가 될 수 있다면

 

굴은 그런 곳을 허락할까

 

무릎과 발목, 심장이나 얼굴이

굴처럼 생긴

 

쥐는 차갑고

쥐는 레몬과도 어울리는

그런 영혼을 생각한다

 

쥐는 무릎을 완성한다

 

월간 『현대문학』 2018년 5월호 발표

 

 


 

배수연 시인

1984년 제주에서 출생.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으로 『조이와의 키스』(민음사, 2018)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