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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찬 시인 / 피리를 불면
호숫가를 거닐다가 갈대 한 개를 꺾어 피리를 삼았다. 내가 그 갈대 피리를 불면 가을 호수 같은 하늘에 백학이 날아와 신기한 춤으로 허공을 메우고 있었다.
다시 그 갈대 피리를 불면 미움의 계곡이 사라지고 사랑의 나무에 열매가 열리고 아이들이 나비의 날개를 펴고 날아와선 사랑의 열매를 따고
내가 또 피리를 불면 바다에는 풍랑이 멎고 악신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가고 하늘 천사들의 노랫소리가 눈물의 무게로 기울어지는 이 지구의 중량을 덜어주고 암흑의 거리에 등이 밝아온다.
신라 하늘에 만파식적(萬波息笛) 평화의 피리여라. 질병이 물러가고 흉화가 사라지고 평화의 새들이 허공으로 줄을 지어 날고 있었다.
내가 피리를 불면 눈물 자국 얼룩진 고운 얼굴 해말갛게 떠올라 달이 되고 소년 소녀들의 귀는 구만 리 그 먼 길을 지척으로 달려와 입가에 여무는 오렌지 죽은 자의 머리 위에 별들이 내려와 앉는다.
각시멧 노랑나비가 계절의 바구니를 목에 걸고 꽃가루 뿌리며 날아오고 있다. 그 꽃가루는 다시 수천만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날아내리고 있다. 내가 피리를 불면 불운한 사람은 이 땅에서 사라진다.
나는 피리에게 물어 본다. 어디에서 온 평화의 악기냐고 선한 음성이 사라지고 어진 음성이 멎은 이 땅에 한 줄기의 광명으로 내려온 하늘의 마음이라고, 사랑의 심정 평화의 춤이라고 피리는 청청히 울리며 대답하고 있었다.
나비제(祭) 1, 백록출판사, 1983
황금찬 시인 / 한 알의 밀
한 알의 밀이 땅에서 죽다. 세월이 흘러간 뒤 백, 천 개의 밀을 그곳에서 다시 찾았다.
이 하늘의 이치를 알았더라면 내 이웃을 위해 사랑의 옷을 묻었으리라.
이제 내가 가고 나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여무는 두 방울의 이슬―.
기도의 마음 자리, 성서교리간행회, 1981
황금찬 시인 / 허공
나비가 날아갔다. 빈 허공 나는 그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따라가는 꽃잎이 어느 여울을 흐르고 있을때 물기에 젖었던 아침 종소리가 수정 조각같이 빛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홀연 나비가 날아온다. 두 폭의 날개로 허공을 덮는 대왕팔랑나비 북방흰점팔랑나비 제주꼬마왕팔랑나비 왕자팔랑나비 은점박이꽃팔랑나비
두 폭 날개는 신비의 부채같이 비를 뿌리고 바람을 튀기며 사랑을 부르면서 눈에 가득하여라.
지금 허공을 가득히 채우며 날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나비였느니 눈과 허공 사이 장벽으로 장벽으로 싸여가고 있는 것은 두 폭의 날개였고
소녀들의 상냥한 웃음소리 은방울이 일시에 울리는 천 개, 만 개의 울림 여기가 어느 광야에 불타는 제단인가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끝없는 날개
나는 청자로 이룩된 사각의 잔에다 꿀을 부어 차돌 반에 놓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고 수목을 사랑하였으며 저들의 기는 곤충이며 물 속의 작은 고기떼까지 사랑할 수 있으니 이제 내려앉아 이 향연으로 타오르는 소망을 이루게 하라.
기다리는 마음이 하늘에 다다르면 그러면 하늘도 변모하느니 다만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이다.
나비여 내 기다리고 기다리는 나비 평화의 날개, 사랑의 언어를 날개 두 폭으로 하늘을 덮는 그 이상한 순간을 위하여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거니 다시 어느 날에 살아올 그 찬란한 광명을 생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나비제(祭) 1, 백록출판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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