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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준태 시인 / 쟁기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3.

김준태 시인 / 쟁기질

 

 

밭을 갈세 밭을 갈세

이 밭 저 밭 밭을 갈세

황소 몰아 황소밭을 갈고

암소 몰아 암소밭을 갈고

어깨 들어 마음도 일으켜

산 너머 황토밭을 갈세

강 너머 모래밭도 갈고

달이 뜨면 어둠밭도 갈세.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진도 아리랑

 

 

막걸리 마신 힘인지 돌을 던진다

떨어지는 곳마다 흙냄새 흘러 넘쳐

솜저고리 소매 걷어 올려 녹두 따는 처녀야

녹두를 따다가 버선발로 엎어지면

일으켜 주는 시늉하며 껴안아 보리라

추렴판에 고기 한 점 더 집어삼키다가

입씨름 끝에 오리나무 몽둥이 맞아

집어삼킨 한 점을 다시 토해놓고서

녹두잎 푸르름 같은 너를 보러 왔다야

하늘 흐르는 천 갈래 만 갈래 햇살은

이젠 우리 것이 아닌 남의 것이란데

속눈썹 이슬 맺혀 고개 숙이긴 왜 숙여

전쟁통에 방아쇠 징 박힌 이내 손도

환장하게 부드러운 연보라 그대 옷고름

녹두콩 스민 듯한 적삼 속을 파고 들어

첫날밤 황촛불처럼 가만히 꺼져버리면

솜저고리 소매 내리고 달아나는 처녀야.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짧지만 길고 긴 사랑 노래

 

 

새벽빛이 스며든

나뭇잎 위에

물방울이 맺혀 숨쉬듯

내 그대의 어깨 위에 가만히 얹히리

바다가 멀리 보이는 산 너머 산 위로

하이얀 해오라기떼들이 날아가 나래치듯

사랑이여, 떠나간 사랑의 몸살의 그림자여

내 그대의 슬픔 속에

하얗게 부서지며 파도치리

지금은 그러나 영원한 그대여.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찔레꽃

 

 

그대여 눈 비비려거든 내게로 오라

찔레꽃 흰 입술도 옆사람을 포개고

찔레꽃 푸른 가시도 그대 피맺힌 노래 풀어

파흐라니 삐죵 삐죵 울라면 울어다오

출렁대는 강물 위에 흰구름이 잠기듯

바람에 얼굴 비취며 가는 몇 마리 새

나 없을 때 와 몰래 향기를 머금는다

그대여 피 비비려거든 내게로 오라

숲속에 흐르며 사운 사운대는 혼(魂)무더기

가지에서 가지로 푸드득 날면서도

달걀만한 살의 봉지 열고 저러이 운다

하늘을 날던 그 마음 행여 잊을까봐

찔레꽃 피는 아픔도 행여 빠뜨릴까봐.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려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金準泰, 1948년 7월 10일~) 시인

1948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 조선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 대학 1학년 재학중인 1969년 〈시인(詩人)〉지에 《시작(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어메리카》 · 《신김수영 (新金洙瑛)》 · 《서울역》 · 《아스팔트》 등을 발표하고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참깨를 털면서》가 당선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였다.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칼과 흙', '밭詩', '달팽이 뿔' 등과 영역시집 'Gwangju, Cross of Our Nation', 세계문학 기행집 '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 남과 북ㆍ해외동포 시인들의 통일시에 해설을 붙인 '백두산아 훨훨 날아라'를 썼다. 전남고등학교 교사, 신북중학교 교사, 광주매일 편집국 부국장, 광주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부장, 조선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5.18 기념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