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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23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3.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23

 

 

우리들의대장만출이가스스로저희삶과바다를반납한것(좋게해석해서)이라고가정한다면, 공구는정말달랐다.

 

공구는정말달랐다. 그녀석은이른봄에제일먼저피는할미꽃이고, 이른봄에천사에게서제일먼저날개를받아날아다니는찔찌리새였다. 청승맞게새의울음소리를잘내는공구의겨드랑이에는언제나날개가두장달려있다.

 

녀석이날개를퍼덕이며날아다닐때우리들은하늘속이거나별속에떠있었다. 위험해위험해, 초장동사람들은우리들이떠있는것이위험하다고항상공구의날갯죽지부터묶어놓았다. 우리들이숲속에서잡은찔찌리새를갖고놀다가새가죽자공구는울었다. 이른봄바다가보이는언덕에서새의장례식을올리며공구는한마리찔찌리새가되어울었다. 어른들에게날개를뺏긴공구는결코날지않았지만그대신한마리새가되어울었다. 며칠뒤공구가죽고우리들의머리위로처음보는커다란날개를퍼덕이며공구가날아올랐을때, 우리들은저마다함께날아오르려고버둥거렸지만모두땅으로떨어졌다. 그새는먼별속으로날아갔다.

 

별을보며인사동에정박하다. 새벽두시, 수부들은부질없이날아오르기를다투며술을마시다. 공구가가진날개를빌지않고나는착실하게나의노만저으리라. 노를젓고저어서저별에닿으리라.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25

 

 

서울대공원의 열대실에 죽은 듯이 엎드린 악어는 박제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동전을 던져 악어를 깨우려 들지만, 악어는 정작 깊은 잠에 빠진 것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나도 정작 이 여름에 박제된 한 마리 악어일까. 종로나 청계천 물목을 어렵게 노질하는 수부, 내 친구 가운데도 악어가 한 마리 있다. 돈이든 여자든 먹성 좋게 해치우는 걸 나는 언제나 못본 척했다. 톱니같은 이빨로 강철과 대지를 잘라먹는 더 큰 악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같이 태풍이 이는 날은

나도 어차피 서울대공원의 동물원에나 가서

물질하는 한 마리

포악한 짐승이 되는 수밖에 없다.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 항해일지 27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이 쓰러지고

죽은 임홍재(任洪宰)가 누웠던 휘경동 위생병원

이승과 저승의 물길을 넘나들던

우리의 수부 이탄(李炭),

우리는 마음 졸이며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가를 귀기울였다.

삶과 죽음의 절반

그때 중환자실에서

그의 아내가 외던 기도 소리

그의 가족들이 탄 배가 좌초해 있을 동안

우리는 진눈깨비 뿌리는 외항을 돌며 깃발을 흔들었다

고장난 그의 배가 수리되고 있을 동안

우리는 기울어진 그의 심전도를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그의 배가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기까지

우리 또한 가야 할 물길

젊은 시인이여, 일어나라

그대 찢어진 돛폭에 우리가 달 수 있는 것은

한 줄의 맑은 사랑

한 줄의 궁핍한 시밖에,

더 무엇을 바라랴.

 

항해일지, 문학세계사, 1984

 

 


 

김종해 시인

김종철 시인의 형으로 부산에서 태어난 김종해는 1963년 『자유문학』 신인상에 시 「저녁」이 당선되고, 이어 1965년 『경향신문』 신춘 문예에 시 「내란(內亂)」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1966년 첫 시집 『인간의 악기(樂器)』를 펴낸 그는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 뒤로 시집 『신의 열쇠』(1971) · 『왜 아니 오시나요』(1979), 장편 서사시 『천노(賤奴), 일어서다』(1982), 시집 『항해 일지』(1984) ·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1990) · 『별똥별』(1994) 등을 펴낸 바 있다. 그는 1982년에 ‘현대 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1985년에 ‘한국 문학 작가상’ 한국시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