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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묵시록(黙示錄)의 사기사(四騎士)
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지고 면류관(冕旒冠)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묵시록 6 : 1~ 2)
병사들은 오지 않는다 대신 안개 군단이 온다 안개는 와서 창문을 지우고 두께를 알 수 없는 벽을 지우고 안개는 경계를 먹어치운다
한 대의 시내버스가 힘차게 가고 있을 때 안개는 차체를 먹어치운다 바퀴를 먹어치우고 나의 눈빛도 먹어치운다 ─내가 달려가는 시내버스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달려가는 풍경을 보고 있는 걸까
안개는 빌딩을 먹어치우고 안개는 아스팔트를 먹어치우고 안개는 한강교의 교각들을 먹어치우고 먹어치우고 안개는 안개를 게운다
여섯 명의 어린이가 줄넘기를 시작했을 때 새악씨 들어오고 ……새악씨 지워지고 남비뚜껑 들어오고 ……남비뚜껑 지워지고 두부장수 들어오고 ……두부장수 지워지고 꼬마 들어오고 꼬마야 꼬마야 침을 뱉어라 꼬마야 꼬마야 별을 세어라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불러라 꼬마야 꼬마야 가위바위보! ……뱉은 침이 간 데 없고 ……세던 별이 간 데 없고 ……부르던 노래 잦아들고 ……내민 가위가 잘려지고
여섯 명의 어린이가 줄넘기를 끝냈을 때 안개는 운동장을 먹어치우고 땅을 지우고 하늘을 지우고
하늘을 달력처럼 말아쥐고 떠나려는 자, 게 섰거라 ! 땅을 보자기처럼 싸들고 떠나려는 자, 게 섰거라 !
2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묵시록 6 : 3~4)
구름을 타고 안개 병사들이 온다 나팔 소리 삘랄라 울릴 적마다 나팔 속에서 병사들이 쏟아진다
─나팔 부는 자, 그 누구인가 소리 뒤에 몸 감추고 내 일생의 말을 모두 지워 버리는 자, 그 누구인가
안개 병사들이 보자기를 털 듯 땅의 네 귀를 틀어쥐고 우리를 털어낼 때 갑자기 산맥들이 공중에 튀어오르고 바다가 거대한 대포를 쏘며 항진해 올 때
탕! 탕! 손들엇! 이것은 옛말 내 칼을 받아랏! 이것은 더욱 옛말 아무도 총 쏘지 않아도 모두 쓰러진다 자던 잠 더 자고 싶어 옆으로 쓰러진다 강물은 핏물이 되어 흐르고 태양도 지워지려 하는 듯
─공중에 나는 영혼들이여 부리를 세우고 저기 저 쓰러진 네 육체를 배 부르도록 쪼아먹어라
3
세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세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묵시록 6 : 5)
정복자들이 오지 않았어도 우리는 정복된 것을 안다 정복자들은 오지 않는다 대신 안개 군단이 온다
이슬 먹고 이슬 게우는 안개 군단이 온다 이슬 상처를 기르고 이슬 벼를 거두는 굶주린 안개 군단이 온다 오늘 밥상엔 이슬 국과 이슬 밥과 이슬 김치와
─너희에게 가죽 허리띠와 이슬을 내리노니 위장을 졸라매고 이슬을 마시라 내가 너희에게 안개를 내리노니 영원히 배고픔에 처하노라
하늘과 땅이 사라진 자리에 안개 이불을 덮고 안개 요를 깔고 우리가 잠들면서, 서로의 가슴을 더듬으며 배고픈 사랑을 꿈꿀 때 너와 나의 입술과 입술 사이로 너와 나의 난자와 정자 사이로 슬며시 안개 이슬 한 방울이 끼어든다
보라, 이윽고 내가 달과 별에 두 다리를 걸치고 아기를 낳고 있지 않은가 보라,
이윽고 내 자궁 속에서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저 이슬 포도송이들을, 쉴 새 없는 안개를 보라, 내가 잉태하여 딸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슬이라 하리라
4
네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네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묵시록 6 : 7~8)
확실한 하늘이 사라지고 확실한 땅이 사라지고 조용히 안개의 도시가 썩고 있을 때 바람난 여자의 자궁처럼 문드러지고 있을 때 느닷없이 도시 전역에서 불끈불끈 솟는 옻나무
내 전신을 타고 오르며 팔을 내뻗는 옻나무 가지들이여 전신에 꽃피는 찬란한 옻의 꽃들이여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던 질긴 나의 육체여 물레를 돌리듯 하염없이 풀어져 나와 발밑에 드러눕는 실낱 같은 나의 뼈들이 안개의 장막을 짜고 있도다
역사 속에서 뛰쳐나온 영혼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며 꽃핀 내 소뇌 대뇌를 쪼아댈 때 그리고 말없이, 부드러운 나의 정복자들이 피고름나는 나의 종기를 애무할 때
별나무에서 별 떨어지듯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 떨어지듯 나의 육신을 벗어나 저 심 연 으 로 아아 나의 두개골인가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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