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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 / 근황(近況)
바닷가의 조개껍질처럼 비린내 나는 육신과는 헤어지고 세상 파도에서는 밀려나 일흔의 나이를 살고 있다.
나를 이제껏 살아남게 한 것은 나의 성명(性命)의 강(强)하고 장(長)함에서가 아니라 그 허약(虛弱)에서다.
모과(木瓜)나무가 모과(木瓜)나무가 된 까닭을 모르듯이 나 역시 왜 시인이 되었는지를 스스로도 모른다.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나의 생애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칠죄(七罪)의 연못을 휘저어 온 모험과 착오의 연속, 나의 심신(心身)의 발자취는 모과(木瓜) 옹두리처럼 사연투성이다.
예서 앞길이 보이지 않기론 지나온 길이나 매양이지만 오직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끌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모과(木瓜) 옹두리에도 사연이, 현대문학사, 1984
구상 시인 / 기도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 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보이게 하소서.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구상 시인 / 까마귀
1
봄놀이 버스가 들떠서 달리는 고속도로(高速道路) 한복판에 까마귀 한 마리 날아와 앉아 울고 있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예전에는 내가 저 산등나무 위에서 두세 번 목소리만 내어도 사람들은 걸음을 멈춰 오늘의 자기 행신(行身)을 불안해하고, 자기 삶의 모습을 살피기도 하고 죽음을 떠올려도 보고, 더러는 영원이라는 것도 생각들을 하더니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요즘 세월은 어찌된 셈판인지 내가 이렇듯 아스팔트 한가운데까지 나와 기를 쓰고 우짖어대도 오고가는 차 하나 멎기는커녕 그저 줄달음치는 굳게 닫긴 차창(車窓) 속에서 저런 쓸모없는 날짐승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었구나 하는 눈짓들이니
까옥 까옥 까옥 까옥
거리에서 쫓기며 헤매는 참새떼 소리나 저희 집 새장 안의 앵무새 소리나 창경원(昌慶苑) 철망 속의 꾀꼬리 소리 같은 그 철딱서니없는 노래들만을 노래로 알고 들으며 사는 저것들이 오늘날 벌리고 있고 또 내일도 벌릴 그 세상살이라는 게 나로선 하두 맹랑해 보여서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오산(烏山) 인터체인지 근처 고속도로(高速道路) 한복판에 까마귀 한 마리 역사(轢死)를 각오한 듯 나와 울고 앉아 있다.
2
나는 비탈산, 거친 들판을 헤매면서 썩은 고기와 죽은 벌레로 배를 채우며 종신서언(終身誓言)의 고행수도(苦行修道)를 하는 새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너희는, 영혼의 갈구(渴求)와 체읍(涕泣)으로 영영 잠겨버린 나의 목소리가 불길(不吉)을 몰아온다고 오해하지 말라.
오직 나는 영통(靈通)한 내 심안(心眼)에 비친 너희의 불의(不義)가 빚어내는 재앙(災殃)을 미리 알리고 일깨워줄 따름이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오늘도 나는 북악(北岳)허리 고목(古木)나무 가지에 앉아 너희의 눈 뒤집힌 세상살이를 굽어보며 저 요르단 강변(江邊) 세례자(洗禮者) 요한의 그 예지(豫智)와 진노(震怒)를 빌어서 우짖노니
―이 독사(毒蛇)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하느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자는 한 벌을 헐벗은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넉넉한 사람은 굶주린 이와 나누어 먹고 권세가 있는 사람은 약한 백성을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쓰지 말 것이요, 나라의 세금은 헐하고 공정하게 매겨야 하며 거둬들임에 있어도 부정(不正)이 없어야 하느니라―
까옥 까옥 까옥 까옥
까마귀, 홍익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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