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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시인 / 꽃과 언어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선공간, 성문각, 1966
문덕수 시인 / 나비의 수난
비실비실 포도를 가로질러 가는 연둣빛 어린 나비, 신(神)이 찢어버린 한 점의 색종이다. 느린 시내버스의 옆구리에 부딪힐 듯 날쌔게 몸을 빼는 택시의 그 소용돌이치는 기류 속에 휩쓸려 치솟을 듯이 몸부림을 치다가 간신히 빠져나온다. 이윽고 뒤쫓는 까만 세단의 앞유리에 걸려 그대로 절벽에 떨어지듯 멀리 밀려갔다간 놓여나 한숨을 돌린다. 휘말려가고 끌려가고 부딪히는 연둣빛 어린 나비, 신(神)이 찢어보낸 한 점의 색종이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만남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 손을 잡고 흔든다, 웃으며. 그러다가 한동안 나란히 걸어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걸어간다. 그것은 강물이다, 바다다. 두 사람은 빙그레 웃는 듯 노려본다. 빛이 다른 옷을 갈아입는다. 홱 돌아서고 멈칫 물러서더니 주먹으로 맞붙어 치고 받는다. 꽃처럼 난만한 상처 이윽고 서로 끌어안으며 뺨을 부빈다. 하늘은 맑고 냇물은 옥을 굴린다. 두 사람은 냇가로 갈라선다. 냇물은 점점 벌어져 바다가 된다. 갈매기만 날으는 세월이 흘렀다. 바다는 꽃송이처럼 오므라들었다. 두 사람은 물가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 손을 잡고 흔든다. 앉았다 일어섰다 춤을 추다가 다시 별 하나를 찾아 나서듯이 숲속의 나그네가 된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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