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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경 시인 / 소리가 사라진 숲
숲이라는 집합체 속엔 나방과 은폐와 트럼펫이 있었다 숲으로 한 번 빨려 들어오는 소리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숲은 트럼펫 같은 구조였고 형체가 있는 소리는 은폐하기에 좋았다
숲을 지키는 간수의 귀는 멀었고 간수는 가까운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묵묵히 지켜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 미로에 갇힌 소리들을 어루만지며 어떻게 정리할까 궁리했다
숲 입구에는 노간주나무가 간수처럼 있었다 바늘 같은 잎사귀로 소리 한 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간수는 트럼펫 연주를 즐겨했고 청중은 나방과 노간주나무였다 여러 소리가 혼합된 음악에는 간수의 독백도 들어있었는데 그날의 독백은 숲에 여기저기 버려진 소리 중에 하나였다
귀를 기울이면 그가 소리를 보는 일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가 소리를 그리는 사람이었다고 단정했다
숲은 텅 빈 채로도 소란하고 울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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