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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인 / 벼랑끝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 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한밤중을 느꼈습니다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 봉함된 가을
먼 곳에서 하늘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어느 두 손으로 묵묵히 용납합니다
가을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짝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사과나무가 되어 밤늦도록 책상 앞에 사과 잎사귀를 펼쳐 놓고 시를 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사과나무가 되어 무수히 열린 사과열매를 등불로 삼아 시를 써야 합니다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불
네 힘으로 뜨고 네 힘으로 공손해지라, 네 힘으로 열고 네 힘으로 잠재우라. 가라, 네 곁에 가서 네가 너를 맞이하라, 네 곁에 가서 네가 너의 밤을 맞이하라. 너의 힘 속에 너의 발을 세우고 징그러운 상처를 퍼어렇게 폭로하라. 가라, 네 곁에 가서 네가 너의 힘을 맞이하라. 너의 주검 속에 너의 창(槍)을 더 깊숙히 꽂으며, 너는 너. 불 속에서 식식거리는 산돼지 대가리. 산돼지 옆에서 식식거리는 산돼지 대가리. 산돼지 옆에서 솟아오르는 산돼지 대가리. 너의 상처 속에 너의 고름을 채우고, 너의 주검 위에 강철의 언어(言語)를 덮어라.
시편, 문학과예술사, 1982
조정권 시인 /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원제 :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形態)
하나
새앙철 지붕 위로 쏟아지는 쇠못이여 쇠못 같은 빗줄기여 내 어린날 지새우던 한밤이 아니래도 놀다 가거라
잔디 위에 흐느끼는 쇠못 같은 빗줄기여 니 맘 내 다 안다 니 맘 내 다 안다 내 어린날 첫사랑 몸져눕던 담요짝 잔디밭에 가서 잠시 놀다 오너라
집집의 어두운 문간에서 낙숫물 소리로 흐느끼는 니 맘 내 자알 안다 니 맘 내 자알 안다
둘
풀밭에 떨어지면 풀들과 친해지는 물방울같이 그대와 나는 친해졌나니 머언 산 바라보며 우리는 노오란 저녁 해를 서로 나누어 가졌나니
오늘 먼 산 바라보며 내가 찾아가는 곳은 그대의 무덤 빈 하늘 가득히 비가 몰려와 눈알을 매웁게 하나니
셋
바람이여 네가 웃으며 내게로 달려왔을 때
나무는 가장 깊숙한 빈터에서 흡족한 얼굴을 밝힌다
바람이여 네 지순(至純)한 손길이 내 몸을 열어놓을 때
나는 낮은 움직임 바다 밑으로 손을 펴 눈먼 이의 눈먼 가슴을 더욱 가라앉힌다
넷
지난해의 빗물에 녹이 슨 꽃이 다시 녹슬기 시작한다면 바라보다가 녹이 되어 떨어진 당신의 눈은 향기가 소모(消耗)된 나무 껍질일 것이다 다시 녹슬은 꽃이 우수수 진다면 문질러 보다가 분질러진 당신의 손은 참혹한 덩어리일 것이다 빗줄기들이 유리에 부딪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귓속에 병마개를 틀어막고 들어야 할 것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당신의 시간이 멈춘다면 시간은 죽어 숨소리를 그칠 것이다
다섯
한없이 어루만지는 부드러움이 되는 당신의 두 팔을 받으며 편안히 눕는다. 당신의 마음은 나의 옷, 포근한 온기(溫氣)를 온몸에 감고 잠이 든다. 당신의 애정은 푸른 밥, 나의 소화기관은 하루 종일 꽃망울을 벌어 일초일초(一抄一抄) 꽃피워 낸다. 태양이 한 아이의 손바닥에 가지런히 씨앗을 올려놓고 웃음짓듯이 당신의 눈길이 내 눈을 묶을 때 나는 순한 물이 된다. 속삭이고 싶다. 지나가는 바람에게 마음을 주고 싶다. 형태 없는 가을에 내 손에 와 닿는 것들은 순한 물이 되어 고인다. 나의 틀은 좁은 마당에서도 알맞다. 당신의 눈이 내 눈에 고이고, 나는 잘 길들여진 어린 나무, 친근한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싶다. 오래오래 헤매고 싶다. 형태 없는 가을에 사면이 하얗게 칠해진 마당에서 나는 순한 물이 되어 고인다. 당신의 살 위에 내 살을 댄 채.
여섯
비 내린 풀밭이 파아란 건 풀잎 속으로 몰려가는 푸른 힘이 있기 때문이다 풀밭에 힘을 주는 푸른 손목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풀밭이 노오랗게 시드는 건 힘을 주던 손목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대에게 보일 것이다 우리들의 몸 속에서도 힘을 주던 손목이 사나워져가고 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세 명의 사나이가 풀밭에 서면 풀밭과 세 사나이는 하나다 세 명의 사나이가 풀밭을 지나가면 풀밭과 세 사나이는 둘로 격리된다
그것은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였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속에서는 분질러진 마음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그것은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였다
나는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균열된 유리창을 통하여 풀밭을 바라보는 세 가지 마음들을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들을 나는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비 내린 풀밭으로 걸어나가는 세 개의 발이 갇혀 가다가 도망쳐 나오는 시간의 궤적과 공간(空間)을 그 튼튼하고 확실한 형태들을
일곱
그믐밤 헛간에 빠졌을 때다. 나는 부러진 도끼처럼 뒹굴었다. 완강한 어둠 속에서 흰 팔의 소리들이 나를 불러내고 있었다. 다 탄 심지(心枝)처럼 겨울나무들이 몰려오고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바람소리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흰 팔의 소리들이 뼈를 쪼개고 있었다. 소리들은 찢어진 살을 만지고 있었다. 바늘을 삼킨 위독한 나를 부르며 잃어버린 나라에서도 불타오르던 암석들을 데려오고 있었다. 물이 엎질러진 마당 구석에서 아이들은 얼굴을 비춰보며 놀고, 나는 얼음이 갈라지는 헛간의 빙벽에 매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소리들이 뼈를 부딪히고 있었다. 소리들은 바다로 기울어져 가고, 내 안에서는 하얗게 고함치며 갈라지는 뼈가 있었다. 그러자 바람이 메마른 나뭇가지의 살을 씻어내리다 실신(失身)하는 바다에서 흰 팔의 소리들이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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