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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종이놀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7.

이하석 시인 / 종이놀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숫타니파아타

 

1984년 1월, 우리 시쟁이들 몇은 대구에서 소리를 접고 펴는 일을 벌였다. 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명을 받으며 시를 쓰고 고치는 행위를 해 보였다. 나의 시를 사람들에게 읽게 한 후, 고쳐 써선 다시 읽히고 고쳐 썼다. 그건 나의 놀이였을까? 아니면 나를 지켜본 그들의 놀이였을까? 또는 그건 놀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들은 그 때 그 자리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1. 소리

 

종이를 찢는다. 오오하고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구긴다. 히유하고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

 

유리잔 너머 남자가 노랗게 돌아보고 여자가 분홍 잠옷으로 걸어나오는

광고지를 접는다.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부딪치며 부스럭 소리가 난다. 부스럭거리는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째애앵

찢어진다. 유리잔에 금이 갔나보다.

나는 시를 긋는다. 종이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들린다.

 

나는 시를 구긴다. 종이로 시를

접는다. 내 시의 종이는 끊임없이 찢기고 접혀지며

부스럭거린다. 시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난다. 시를 찢으면 히유하고

종이 찢겨지는 소리가 난다. 히유와 오오가 부딪치며

시가 접혀진다. 쫘악, 하고 시는 곧잘

찢어진다.

 

나는 시를 찢는다. 나는 아무 종이에나

시를 구긴다. 아무것도 아닌

찢김, 아무것도 아닌 구겨짐, 아무것도 아닌

접히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내던짐, 아무것도 아닌

부딪침, 아무것도 아닌 떨어지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2. 시

 

종이가 하얀, 또는 노란 빛 속에서

펴진다. 내가 들어 있는 빛을 둘러싼 어둠 속엔

숨죽인 백여 명의 어깨들이 있다. 어두운

눈들과 귀들이 있다. 나는 시를 쓴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다. 내 손과 어깨를

보고 있다. 강한 빛 속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어둠 속의 그들을 나는 안다. 나는 시를

쓴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흰 빛의 종이 위에, 어둠으로.

 

유리잔이 맑게 놓이고,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여자가 분홍 잠옷만으로 걸어나오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이 씌어져 있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이 구겨지며 남자의 어깨와 닿는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닿은 채로

쫘악, 찢기는 소리를 낸다. 아름다와 운 삶이 서로 떨어

진다. 찢어지는 소리 멀리, 유리잔이 금 가는

소리가 반짝인다. 나는 시를

쓴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끊임없이 누가 나를 보고 있고, 내가 종이를 접을 때

빛 속에 숨어 있던 그늘 몇 장이 은밀하게 접혀진다.

또는 내가 종이를 찢을 때 몇 개의 어둠은

튄다. 찌직하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찢을 때 시가 찢기는 소리가 히유, 하고

들린다. 어둠 속에서 흠흠, 기침 소리도 난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어둠 속엔 숨 죽인 채 나를 보는 백여 명의 마른

침들이 각자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간다. 마른침이

올라가는 쪽으로 찢기는 종이 소리는 깡통 속

반 쯤 채워진 모래 소리이다.

 

나는 시를 만든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린다.

나는 등을 구부린 채 볼펜으로 시를 쓴다. 모래알이

바람에 쓸린다. 나는 어깨를 추스리며 종이를 구기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소리가 허물어진다. 나는 다리를 펴거나

이따금 기지개를 켜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위로

따스함이 배어든다. 그들은 기침을 하면서

나를 본다. 모래가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왼 주먹에

턱을 괴고 나를 본다. 모래가 일어서며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옆구리로 숨을 쉬며

나를 본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리고 모래밭은 경전처럼

펄럭인다. 나는 팔짱을 끼고 허벅지로 숨을 쉬며

시를 만든다. 누가 모래를 밟는 소리.

 

3. 사랑

 

종이가, 고즈너기, 빛 속에서, 펴진다. 펴진

종이 위에,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쓰다가

구겨 버린다. 구겨지는 소리가 빛을 흔들고

탁자 위 몇 장의 흰 종이를 흔든다.

빛의 바깥, 구겨진 종이 내던져진 어둠 속에

눕고 싶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수치와 암담함의 백지가 만져진다.

 

유리잔이 놓인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분홍 잠옷만으로 앉아 있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자가 씌어 있다.

찢어 버리고 싶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을

구기면 남자의 어깨에 닿아 짖이겨진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은

닿은 채로 쫘악, 찢어진다. 아름다운과 삶이 떨어져

내동댕이쳐진다. 유리잔의 날카롭게 부서진 잔해 속에

노랑과 분홍이 서로의 몸을 찌르며 엎질러진다.

 

나는 시를 만든다. 알 수 없다. 또는 시가 나를

만든다.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시.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종이.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독자. 알 수 없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나.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내 구겨진 종이의

몸을 펴고 싶다. 알 수 없는. 몸과. 마음으로.

 

다시 내가 구겨서 던진 종이를 주워 펴 본다.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펴진 종이 위에 씌어 있다.

그러나 구겨진 종이는 유리잔의 금처럼 찢겨진 자국이

짓이겨져 있다. 새 종이를 꺼내,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다시 쓴다. 종이 위 볼펜을 쥔 손아귀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어둠과 시와 삶이, 노오란 파란

또는 무지개를 이룬 섬세한 모든 색들이

다림질한 책상보처럼 곱게 펴져 어른댄다.

종이를 함부로 찢거나 구겨서 버리지 말라.

나는 사랑이라고 쓴 종이 위에

내 몸을 펴며 포갠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초록의 길

 

 

때때로 가벼운 주검이

아주 가까운 데서 만져지는 수가 있다.

11월의 오후, 차고 마른 풀잎들이 모여 있는

도시 변두리 또는 도심의 공터의

푸른 빛이 먼지와 함께 흩어지는 곳에서.

 

방아개비 한 마리를 내가 사는 아파트의 빈터에서 서성대다 발견했다. 아이들의 노래소리 가까이 그 주검은 아무도 몰래 버려져 있었다. 바랭이풀의 마른 잎 사이에서 서걱이는 것을, 처음에 나는 빈터 멀리서 날아온 은사시나무 가로수의 마른 잎인 줄 알았다. 그것은 속날개였다. 바깥을 덮었던 초록 외피의 튼튼한 겉날개는 떨어져 나가고, 속날개는 끝이 찢긴 채 몸체에 겨우 붙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흡사 죽어간 방아개비의 몸을 떠나, 방아개비의 초록 영혼을 이 도시의 하늘 위로 날리려는 것처럼. 통통했던, 미세한 물결 무늬로 마디를 이루었던 배는 벌레에게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머리 역시 반쯤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껍질뿐인 몸으로 바람에 조금씩 날개 파닥이며 닳아 갔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밑바닥에는 칼날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댔다. 나는 풀밭을 계속 걸어다녔다. 잠시 후 풀섶 아래서 풀무치의 주검을 보았다. 이어서 여치와 잠자리의 주검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 주검들 앞에서 애통해 할 까닭은 없다.

 

가난하게 떨어져 땅에 눕는

내 시간의 따스한 집이여 주검이여

살아 있던 날들의 모든 기억을 고마워하며

우리 함께 여기에 눕느니

내 존재의 끝이자 시작인 너의 가슴에

지금 고요히 누워있으니

 

풀무치와 방아개비, 여치, 잠자리들은 그들의 빛나는 날개로 여름을 분주히 날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었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아파트의 가까운 이웃이 죽었을 때, 애통해 하는 가족들의 울음 속으로 여치 울음이 끊임없이 들렸음을 나는 슬퍼한다. 죽은 이는 밧줄에 묶여 지상에 내려가 장의차를 타고 도심을 빠져 나갔다, 이 도시와 산을 눈물로 이은 길을 만들면서. 또 나는, 사랑하는 이를 그릴 때 풀벌레의 울음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길고 고적한 밤도 보냈다. 내가 발견한 풀벌레의 주검들은 그 때 내 영혼을 흔들던 그것들이었으리라. 지금은 모든 풀벌레 소리도 끊기고, 밤은 너무나 고요하다. 모든 풀벌레들의 울음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온 길을 비로소 찾아 나설 마음이 인다. 풀무치는 초록의 길을 따라, 산이나 들에서 이 도시의 깊은 곳으로 왔다. 처음엔 들판에서 쉽게 이어진 초록의 길이 도시 변두리의 빈터로 이어졌으리라. 그 다음엔 우리가 모르는 풀에서 풀로 이어진 길이 풀무치를 미세하게 이끌었으리라. 그렇다, 이 도심의 회색 콘크리트의 세계에도 자세히 보면―풀무치의 눈으로 보면―들과 산으로 이어진 초록의 길이 있다.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 그런 신비한 길이. 단순하게 자연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삶 속에는 그렇게 열린 길이 있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기자)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전쟁 직후인 1953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명동 난민촌 언저리에서 자람.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 등단. 1978 영남일보 기자. 1980 대구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2005 영남일보 논설실 실장. 시집『투명한 속』(1980) · 『김씨의 옆 얼굴』(1984) · 『우리 낯선 사람들』(1989) · 『측백나무 울타리』(1992) · 『금요일엔 먼 데를 본다』(1996) 등을 냈다. 1990 제9회 김수영문학상. 1990 도천문학상. 1992 제4회 김달진문학상. 1996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