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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그릇 5
혹은 술병(甁)이었을지도 몰라, 한 사내의 어지러운 꿈을 불 사르는 술,
혹은 약병(藥甁)이었을지도 몰라, 한 계집의 들뜬 열(熱)을 잠재우는 약(藥).
길가에 버려져 깨진 병 병은 이제 병이 아니다. 진흙에 묻혀서 번득이는 저 절망(絶望)의 눈.
오늘도 나는 길을 걸으며 무심히 병을 밟는다. 내 살 속에서 깊이 박히는 유리 파편, 꿈도 욕망도 아닌 저 절망(絶望)의 파편.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그릇 6
그릇에 담길 때 물은 비로소 물이 된다. 존재(存在)가 된다.
잘잘 끓는 한 주발의 물 고독(孤獨)과 분별(分別)의 울 안에서 정밀히 다지는 질서(秩序).
그것은 이름이다. 나의 아픔이 되기 위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속박하고 지어미는 지아비 앞에서 빈 잔(盞)에 차(茶)를 따른다.
엎지르지 마라, 엎질러진 물은 불이다. 이름 없는 욕망이다.
욕망을 다스리는 영혼(靈魂)의 형식(形式)이여, 그릇이여.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그릇 7
행운(幸運)을 빌며 안녕(安寧)을 빌며 부딪히는 술잔.
잔(盞)은 타인(他人)의 충족을 위해 스스로를 비운다.
비우기 위하여 채우는 모순(矛盾)의 공간(空間). 잔(盞)은 결코 외롭지 않다. 비어 있는 그것이 충족이므로.
이 밤에도 외로워서 술을 드는 인간(人間)이여, 부딪혀라 술잔(盞). 잔(盞)은 빈 것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그리운 이 그리워
그리운 이 그리워 마음 둘 곳 없는 봄날엔 홀로 어디론가 떠나 버리자. 사람들은 행선지가 확실한 티켓을 들고 부지런히 역구를 빠져 나가고 또 들어오고, 이별과 만남의 격정으로 눈물 짓는데 방금 도착한 저 열차는 먼 남쪽 푸른 바닷가에서 온 완행. 실어 온 동백꽃잎들을 축제처럼 역두에 뿌리고 떠난다. 나도 과거로 가는 차표를 끊고 저 열차를 타면 어제의 어제를 달려서 잃어버린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운 이 그리워 문듣 타 보는 완행 열차 그 차창에 어리는 봄날의 우수.
오세영 시인 / 꽃
찰랑거리는 기슭에 가을이 센 머리칼을 적실 때 황혼은 난간 위에 등불을 켜다.
멀고 먼 일식(日蝕)의 만(灣)을 향해 올려지는 돛, 밀물에 설레이면서 무거운 닻줄이 들리고,
하얗게 흔들리는 바람 속을 밤은 새도록 나래를 치다. 날개 위에서 거울에 비친 한 여인(女人)의 드러낸 살결 위로 흘러내리던 하늘.
햇살로 음정을 짚으면 등불 위에서 파열하는 꽃, 눈부신 한 악장, 그 물결 너머 꽃잎이 소나기로 허물어져 내릴 때,
시간은 암초 위에 부서지다. 모래톱 위에 앙상한 생명체(生命體)의 픽션,
마른 가지에 마지막 잎이 걸리고 눈물같이 빛나던 저녁을 딛고 서서 목숨은, 어둔 파도를 오르고 있다.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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