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장정일 시인 / 나, 실크 커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7.

장정일 시인 / 나, 실크 커튼

 

 

나는 그 남자를 본다. 수돗가를 향해

조그만 창이 나 있는 골방 속에 들어 있는 남자를

나는 본다. 그는 심한 기침을 해대며

나, 실크 커튼이 쳐진 작은 창이 달린

골방 속에 산다. 그는 입을 오물거려 껌을 씹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가끔 파스 하이드라지드를

입에 털어넣고 주전자째로 물을 마시는 남자.

정말이지 나, 실크 커튼이 보기에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사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본다. 그 남자를 보고, 또 한 여자를

나는 본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비누를 들고 나와 수돗가에서 발을 씻는다.

발가락 사이 사이와 발꿈치 복숭아뼈를 거쳐

종아리와 정강이, 무릎에다 잔뜩 비누칠을 하고서

거친 수건으로 그것들을 세심히 문지르는 그녀.

나, 실크 커튼이 보기에 그녀는 마치

씻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본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외로운 노래를,

나, 실크 커튼은 본다. 수돗가에서 스테인레스 대야가

햇빛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그 남자가

나, 실크 커튼 앞에 바짝 다가서는 것을. 나는

본다. 여자는 두 허벅지 사이에 치마를 끼운 채 발을 씻고,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수음에 열중하는 것을. 나, 실크 커튼은

하염없이 본다. 클클거리며 수음하는 남자를,

기침이 달겨들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떠는 남자를.

그럴 때 그의 몸뚱이는 거대한 기침이 그를 뱉었다,

다시 집어삼키는 것 같고 그때 그는

커다란 기침 속에 들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본다. 그 남자의 깊은 땀샘으로부터, 이마

밖으로 솟아나는 땀방울을. 그래, 그는 땀을 흘리며

손을 움직인다. 그것은 나, 실크 커튼이

보기에도 무척 힘겨워 보이고, 그것은 그 남자의

외로움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시키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남자의 행동은 해변의 모랫벌에서 모래성을

짓는 순수의 소년들이 하는 허망한 짓을 닮았다.

그렇지 않은가? 나, 실크 커튼이 보기에

수음은 금세 부서질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나는 본다. 수돗가에서 발을 씻는 여자를.

그녀 가슴 또한 얼마나 외로움에 사무친 것일까.

나, 실크 커튼이 보기에 그녀는, 저 골방 속에서

한 남자가 나, 실크 커튼을 통하여 비치는 자신의

각선을 훔쳐보며 수음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나, 실크 커튼이 보기에

그녀는 그 남자가 골방 속에서 뛰쳐나와

그녀를 비누 묻은 채 거칠게 수돗가에 쓰러뜨리기를

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의 욕정을 유발시키고 있는 중이고, 강간당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나, 실크 커튼이 보기에

처녀들의 결벽증은 그녀들의 욕망과 비례하는 듯이 보인다.

 

나는 본다. 매일 방안에서 벌레처럼 꼬물거리는

남자와, 하루에도 수차례 발을 씻어야

마음이 놓이는 여자를 나는 나, 실크 커튼을 통해

보고 있다. 나는 그 여자가 발을 씻을 때마다

나, 실크 커튼을 통해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며

수음에 열중하는 남자를 보고, 그 남자가

모래 흩어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래, 그는 정말 모래성같이 풀썩

쓰러졌다. 단 한 번의 가래침으로 만들어진 우리들.

계속해서 나는 본다. 그녀가 마른 수건으로 손과 발을 닦고

흘낏, 골방 쪽의 창문을 바라다보는 것을, 그러나

그녀는 나, 실크 커튼 뒤에 있는 나를 보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방바닥에 웅크린 남자를.

아무 책장이나 죽, 찢어 그 남자가

자신의 손가락 사이와 방바닥에 끈적이는 점액질을

닦아내고 있는 것을 나, 실크 커튼은 본다.

그리고 나는 그가 모래처럼 흩어져 있다가

다시 하나의 모래성으로 모이는 것을 볼 것이다.

그녀는 몇 시간 뒤 수돗가에서 다시 발을 씻을 테고

그때 그는 나, 실크 커튼 앞에 서서

나, 실크 커튼을 통해 안전하게 보여지는 그녀의 자태를

훔쳐보며 굳은 모래성을 쌓을 것이기에.

 

결벽증에 걸린 뜨거운 여자이자

한 줌의 모래 1과

욕정이 절정에 달한 결핵 3기의 남자인

한 줌의 모래 2의

서로 만나지 못하는 연극.

나, 실크 커튼으로 가로막힌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장정일 시인 / 도망중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도망중이었다.

한 사나이는 새침한 여자와 만난다 그녀는

예뻤고 그녀는 귀여웠고 도망중이었고

사나이는 그녀가 좋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사내는 매일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지요 붉은 장미를

사지요 비 오는 공원에서 기다리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그녀에게

구혼을 한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신접

살림을 차린다. 그 살림은 도망중이었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묻는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아내에게

묻는다. 아직 소식이 없어, 왜 그렇지?

그날 밤 남자와 여자는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남자와 여자는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아직도야?

사나이는 초조해서 유순하고 순한 개 한 마리를

사온다. 사나이는 메리라고 부르며 그 개의

목을 끌어 안는다. 그때 메리는 그 사내의

강한 팔뚝 속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개 또한 도망중이었다.

 

한 사나이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의 뺨을 한 대 갈긴다.

기분이 언짢아 갈긴다. 아내는 울음을

참고 따진다. 메리가 누구예요, 메리가 대체,

메리가 누구냔 말예요? 사나이는 대답

하지 않는다. 그제서야 아내는 운다.

한구석에 구겨져서 조용히 운다. 울며

아내는 짐을 싼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어요

아내는 짐을 싼다. 깨끗이 끝장내기로 해요.

그러기에 두 사람이 함께 도망 다니는 일은 힘이

든다. 그들은 이제 따로 도망하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태어난다. 도망중에

무관심중에, 고대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어떤 시간중에, 불어오른 메리

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사나이는 돈을 지불

한다 돈을 준다. 메리는, 내가 키우겠어요.

요만큼 가지고는 어림 없어요! 물론 사내는

좀더 준다. 그리고 아카시아향에 젖은 아이

무죄에 싸인 아이와 홀로 산다. 살며

사나이는 발가벗은 아이의 몸뚱이를 꼭 껴안아

자기 귀에 대어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여리게 들린다.

확, 확, 확, 확, 확, 아이는 저 혼자 도망하고 있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시인, 소설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성서중학교를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같은 해인 1987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 1990년 『아담이 눈뜰 때』를 내면서 소설가로 전업.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모든 장르의 글이 영화화되고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우리 문화계에 '장정일 신드롬'을 일으킨 혁신적 작가. 대표작으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안에서의 택시잡기』, 희곡집 『긴 여행』,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는『중국에서의 편지』가 있다. 1987년 제7회 최연소의 나이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 웹진 산티 기획위원. 2006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