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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9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3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9

 

 

그대 아는가.

아직 태어나지 않는

미래의 가인(歌人)들.

내가

허공에서 일월(日月)을 뜯어

그대의 수틀에다 새겨 넣은

탄식과 비탄을.

내가 수없이 허공에서 장미송이를 꺾어

그대의 수틀에다 짜 넣은 심장과

고동치는 세계의 포효를.

내가 가시덤불과 가시나무로서

수놓은 영혼의 방패와 창과 화살.

내가 허공에서 한 줄 바람을 퍼

허공에다 새겨 놓은 노래 구절을.

그 속에서 움트는 미래의 눈동자가 얼마나

하늘의 별보다 높이 반짝이는지,

내 가까이 다가가면서

얼마나 빛으로 떨리는지를.

그대 친구들이여 아는가.

새벽하늘 위에서 부시시 깨어나는 비밀스런 눈동자처럼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고요,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시간,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노래.

별과 같은 가인(歌人)의 미소는 얼마나 부드러운지.

만조(滿潮) 무렵 새벽 별과 함께 고요한 바다의

바위 기슭으로 올라와 짠 물을 토하는 조개처럼

그대의 꿈은 망망대해의 잠 속에서

백합꽃송이를 끌어 올리고,

오, 흰 거품을 자랑스레 뿜으며 열리는 백합처럼 그윽하게

그대의 미소는 새벽 공기와 입맞추며

입술에서는 달콤한 숨소리가 떨려오는지,

그대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가.

보라 친구들이여

미풍의 파도는

혀끝처럼 달콤하고

내가 그것을 마시고 호흡하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의 향기 속에서 얼굴 파묻고 숨을 거두는 백합처럼

내 그대의 미소 속에 익사하여

몇 번이고 두 심장이 성스럽게 고동치고 있지 않은가.

보라 친구들이여,

그대는 듣지 못하는가.

그리하여

환희의 절정에서 소리치는 세계의 침묵이여.

내 가슴을 통과하고 높이 비상하여

내 주위에서 성스럽게 울려퍼지는

경이롭고 부드러운 음률이여.

혀끝처럼 감미로운

음률이여.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0

 

 

저녁나절 땅바닥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 밟으며

도시를 등뒤로 돌리면,

산(山)길은 하루 동안의 인적을 기슭에다 공손히 쓸어 모으고

새 손으로서 밤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

어둠은 지상(地上)의 거주자에게는 휴식이 되지만

나의 위안은 늦종소리 들으며 산(山)길을 걷는 일.

지나온 산(山)길은 물소리 죽이고 앞서 혼자로서 경건히 새 몸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허공의 나무 잎사귀 발등에 떨어져

부재(不在)를 알리는 바람 소리 숲 속 스산하고,

언제부터인가

저 멀리 도회지를 휩싸는 불빛으로부터 나는 버림받았다

태어나서 자라온 도시가 나를 더욱 낯설게 하고

나는 산길과 벗하여 소요로서 위안을 삼고자 하건만.

나의 한숨은 언제 끝날 것인가.

견디지 못할 것은 지금 이 시간이

마치 정수(淨水)를 따르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재를 털어 버린 시간이라는 것.

내가 내 영혼의 그릇을 재떨이로 사용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회한.

문을 닫고 나온 후 등뒤로 달라붙은 적대의 시선과

한 세기(世紀)의 적막, 그 시간의 포효를 아무도 수습할 수 없음을

나는 알건만,

왜 나는 이처럼 미치도록 삶을 사랑하고 싶은 것인가.

그런 것인가.

삶의 나뭇가지에는 때도 없이 눈비 내려

조락(凋落)의 지상(地上)에는

눈비의 노래 그득하고,

나는 새 손으로 다가가

그것들을 껴안아 줄 두 손의 삶을 받들 수는 없단 말인가.

내 이곳에 잠시 멈춰,

어제의 그대들을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을 다 사랑하지 못한 회한 때문.

내 내일의 가인(歌人)을 이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이 나를 한없이 경멸하기 때문.

내 그리움이 젊은 어머니로서 그들을 부르면

늙은 담벽이 한줌 부서지는 흙으로서 대답을 하고

어둠은 저만치 물러서 검은 잎사귀로 입을 막는구나.

나에겐 옛날로 돌아가는 논두렁길이 없고

나는 나의 귀가가 너무 늦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구나, 도시여, 이제는 내가 너희들을 버릴 차례가 온 것이다.

너희들은 언제나 낯선 이방의 언어로서

나를 검문하지 않았는가.

높은 노래는 하늘의 첨탑에 고립되어 있고

거리의 둥그렇게 떠오른 만월(滿月) 속에서는 흰 피의 사냥개가 달려나와

나를 쫓아내지 않았던가.

그렇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을 버릴 차례인 것이다.

내 몰골이 벽 뒤로 숨은 검은 망토의

그 찢어져 나간 한 자락의 어둠으로 가려진다 한들

불빛 환한 식탁 위에서는 조롱하는 천사(天使)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내가 너무 늦었음을 깨닫는다.

오 낯선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여

너는 단란한 테두리를 스스로 지어 보이지만

너에게로 가는 길은 청년처럼 자랑스럽지가 않고

하늘의 별들을 보도에 뿌리고 밟고 가듯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저 수많은 도둑과 야심가의 방패를 뚫을 노래의 창(槍)도 없이,

허공에다 일월(日月)을 그리며

늙은 기침이 되어 발등을 덮는 조락(凋落)의 잎사귀처럼

어둠 짙은 산길을 서성댈 뿐이다.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