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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 / 우리들의 그리움은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다 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울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유신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국민 되는 요건은 민주공화당이 정한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이것은 시가 아니다
친구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무리 수식한다 해도 어차피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와 내 자식의 운명을 바로 보마
내 자식이 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참세상 함께 만들어가는 이것은 시가 아니라 싸움임을 분명하게 보마
강철노조의 조합원들이 파업한 지하철노조의 조합원들이 갇혀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한때는 우리들의 교실에서 우리와 함께 눈물로 시를 읽던 시절이 있었음을 아프게 기억하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프게 기억하마 이 아픔이 아닌밤 나와 내 자식의 가슴을 치고 배창자 속에 소용돌이쳐 피눈물로 서려올 새 세상을 바로 보마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질네야
질네야 질네야 비단옷일랑 남에게 주고 네 몸 여위어 어디로 가나
질네야 질네야 사랑도 꿈도 잃어버리고 네 몸 여위어 비단이 되나
질네야 질네야 비단옷일랑 남에게 주고 여윈 몸 서러워 정처없어라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친구에게
너를 기다린다 나의 오랜 친구여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나는 어둠이 오는 길목에 서서 너를 가둔 감옥의 을씨년스런 벽을 보며 오후 다섯시 반의 애국가를 듣는다 모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 이 삼엄한 정지태의 한순간에 오히려 심장은 강하게 뛰고 있음을 나는 느끼며 두려워한다 두려움 없이 네 이름 부를 수 없고 두려움 없이 너를 밝힐 수 없다 몸은 노동의 고통으로 쇠약해지고 마음은 굶주리는 가족에 대한 염려와 차가운 겨울의 분노로 얼어붙을 때 오직 한 가지 뜨거운 해방의 꿈만으로 마음과 몸을 덥히며 시골에서 공장에서 신문사 앞에서 법원 뜰에서 서성대며 너를 기다리는 동지들을 타오르는 불꽃들을 나는 본다 누군들 두려움 없이 국기 앞에 설 수 있으랴 짓밟혀 쫓겨가는 길목마다 가슴 찢어 두려운 네 이름 새기고 타오르는 온몸 어둠에 던져 너를 부른다 자유여 나의 오랜 친구여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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