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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기명숙 시인 / 감나무의 사상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30.

기명숙 시인 / 감나무의 사상

 

 

발코니 앞 감나무, 갖은 풍설 받아내느라 늙었다 구렁이가 허리를 칭칭 감고 올라간 날 견디다 못한 잎사귀들 파르르 떨었다 손 귀한 집 여자가 비명은 질렀으되 호박구슬 같은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뜨거운 매미울음을 한 됫박 받아내 여염(閭閻)의 언어로 번역한 것도 초록차양을 치고 길고양이 혼주가 된 것도 감나무였다 혁명을 꿈꾸었으므로 사상이 허약한 민중에게 강령을 설파했다 그것이 붉게 익어가는 동안 총 맞은 것처럼 알록달록한 구호들이 떨어져 쌓였다 우듬지까지 기어올라 깃발을 꽂는 사람 평등의 단맛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달착지근한 신념에 벌레가 꾀는 법, 자본주의 대 방출 시대에 웬 요설이냐며 관리인들이 인정사정없이 농약을 뿌려댔다 망령 난 세력을 뿌리 뽑겠노라며 대체수종(代替樹種)을 예고했던 차였다 발목이 시리고 눈썹 끝에서 철새들이 사라졌다 척추를 곧추세워 사상교육에 공을 들여도 잔가지들이 얼어붙거나 부러졌다 푸른 피톨이 뾰쪽뾰쪽 돋기까지 고난의 행군이 필요한 거였다 복받치듯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백발의 마르크스가 우리 집 안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2월호 발표

 

 


 

기명숙 시인

1967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북어>로 등단. 시집으로 『몸 밖의 안부를 묻다』(모악, 201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