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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44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바람 소리. 잘 있거라, 잘 있거라, 해거름 나루터에 달빛 지는데 강 건너 사라지는 님의 말 소리.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갈잎 소리. 잘 가거라, 잘 가거라, 세모시 옷고름엔 별빛 지는데 속눈썹 적시는 가을 빗소리.
이승은 강물과 바람뿐이다. 옷고름 스치는 바람뿐이다. 치마폭 적시는 강물뿐이다. 육신(肉身)으로 타고 오는 물결 소리 마른 하상(河床) 적시는 가을 빗소리.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46
요란한 웃음소리, 이승은 온통 분꽃밭이다. 요란한 박수소리 이승은 흐드러진 장미밭이다.
피날레를 알리는 징이 울고, 불이 꺼지고 빈 객석엔 꽃잎 떨어져 내리고, 밤이 왔다.
막이 내렸다 탈을 벗는 광대여 어제 탈은 잡년 탈, 손타리(孫陀利), 전차녀, 제파달다(提婆達多)* 탈 막이 내렸다. 찢어진 이마를 끌어안고 달밤에 홀로 우는 광대여, 돈으로 에미를 살 수가 없어 정(情)으로 애비를 살 수가 없어 소주 한잔 마시고 비틀거리면,
요란한 웃음소리 이승은 온통 분꽃밭이다.
* 손타리(孫陀利), 전차녀, 제파달다(提婆達多): 전생(前生)에 인연으로 만나 석존(釋尊)을 번뇌에 빠뜨린 사람들.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52
진흙 털고 먼지 털고 해진 신발을 깁는다.
풀꽃을 밟았을까, 이슬 냄새가 난다. 벌레를 밟았을까 쇠똥 냄새가 난다. 돌멩이에 챈 신발 한짝.
애증(愛憎)과 영욕(榮辱)의 하루는 저물었다. 지팡이여, 지팡이여 돌베개의 꿈은 차구나.
웃음을 털고 울음을 털고 피곤한 육신이 잠드는 길섶, 해진 신발 한짝 꿈꾸는 길섶.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60
해진 손으로 끊긴 올을 잇는다. 살 가릴 베 한 필 짜려고, 어둔 눈으로 끊긴 올을 잇는다. 혼(魂) 가릴 베 한 필 짜려고,
갈 바람에 젖어서 우는 베틀, 베틀에 기대어 꿈꾸는 백발(白髮), 부러진 잉앗대에 달빛 삭아 내리는데, 풀린 실타래에 말씀 삭아 내리는데, 빛과 말씀으로 짜올린 수의(壽衣).
해진 손으로 맺힌 올을 푼다. 손 묶을 삼베끈 삼으려고, 어두운 눈으로 맺힌 올을 푼다. 발 묶을 모시끈 삼으려고,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64
꽃씨를 묻듯 그렇게 묻었다. 가슴에 눈동자 하나, 독경(讀經)을 하고, 주문(呪文)을 외고 마른 장작개비에 불을 붙이고 언 땅에 불씨를 묻었다. 꽃씨를 떨구듯. 그렇게 떨궜다. 흙 위에 눈물 한 방울,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 목선(木船) 하나 삭고 있는데, 꽃씨를 날리듯 그렇게 날렸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오세영 시인 / 무명연시(無明戀詩) 65
너를 보았다. 문 밖에서, 닫혀진 우주(宇宙) 밖에서 너를 보았다. 가지 끝에서, 어두운 하늘 끝에서 너를 보았다. 보이는 것은 안개, 눈 내리는 저녁 불빛, 불빛 가득 고인 발자국. 자작나무 숲에 울던 바람은 시방 내 귀밑머리를 날리고 깨어진 피리 하나, 눈 속에 묻혀 있다. 너를 보았다. 문 밖에서 닫혀진 우주(宇宙) 밖에서 너를 보았다. 하나의 별, 한 마리의 새, 너를 바라보는 절망(絶望)의 눈.
무명연시(無明戀詩), 전예원,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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