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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정일 시인 / 새로운 자궁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31.

장정일 시인 / 새로운 자궁

 

 

버릇같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내 몸이 가비엽게 뜨는 듯하더니

어디론가 세차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캄캄하고 비좁은 인큐베이터 속으로!

쇳조각과 전류가 흐르는 네모 상자 속으로!

나는 그 속에서 바보같이 킬킬대고

잽싸게 지껄이고 거짓말하고 미소짓습니다

나는 이 속에서 온갖 죄악과 부패를 배웠습니다

그래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무감각한 한 대의

티 브이일 뿐입니다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청하, 1988

 

 


 

 

장정일 시인 / 성난 눈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 동경을 담은 채로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 핍박받은 것들.

저렇게 충혈해지다니

그래, 눈은 약올랐다.

약오른 눈은 일어선다.

그것들이 네 목을 조를 때,

눈은 튀어나오고 부푼다.

가련한 것들,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들이,

광고들 선전탑들 영화간판들 또는 무분별한 씨 에프에 의해,

하루아침에 시들다니

(오! 섹시, 얼마나 섹시한가, 그런 것들은?)

눈은 병들었다.

꼼짝마, 눈으로 쏘겠어!

내 눈은 성났어!

소리치는,

그 순하고 얌전한 눈들.

가련한 것들.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장정일 시인 / 아파트 묘지

 

 

홀린 듯 끌린 듯이 따라갔네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또박거리는 하이힐은 베짜는 소린 듯 아늑하고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엉덩이는

항구에 멈추어 선 두 개의 뱃고물이

물결을 안고 넘실대듯 부드럽게 흔들렸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그녀의 다리에는 피곤함이나 짜증 전혀 없고

마냥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모두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불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로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어느덧 그녀의 흰 다리는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어둑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낯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시인, 소설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성서중학교를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같은 해인 1987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 1990년 『아담이 눈뜰 때』를 내면서 소설가로 전업.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모든 장르의 글이 영화화되고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우리 문화계에 '장정일 신드롬'을 일으킨 혁신적 작가. 대표작으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안에서의 택시잡기』, 희곡집 『긴 여행』,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는『중국에서의 편지』가 있다. 1987년 제7회 최연소의 나이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 웹진 산티 기획위원. 2006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