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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시인 / 새로운 자궁
버릇같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어요 갑자기 내 몸이 가비엽게 뜨는 듯하더니 어디론가 세차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캄캄하고 비좁은 인큐베이터 속으로! 쇳조각과 전류가 흐르는 네모 상자 속으로! 나는 그 속에서 바보같이 킬킬대고 잽싸게 지껄이고 거짓말하고 미소짓습니다 나는 이 속에서 온갖 죄악과 부패를 배웠습니다 그래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무감각한 한 대의 티 브이일 뿐입니다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청하, 1988
장정일 시인 / 성난 눈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 동경을 담은 채로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 핍박받은 것들. 저렇게 충혈해지다니 그래, 눈은 약올랐다. 약오른 눈은 일어선다. 그것들이 네 목을 조를 때, 눈은 튀어나오고 부푼다. 가련한 것들, 그 순하고 얌전하던 눈들이, 광고들 선전탑들 영화간판들 또는 무분별한 씨 에프에 의해, 하루아침에 시들다니 (오! 섹시, 얼마나 섹시한가, 그런 것들은?) 눈은 병들었다. 꼼짝마, 눈으로 쏘겠어! 내 눈은 성났어! 소리치는, 그 순하고 얌전한 눈들. 가련한 것들.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장정일 시인 / 아파트 묘지
홀린 듯 끌린 듯이 따라갔네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또박거리는 하이힐은 베짜는 소린 듯 아늑하고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는 엉덩이는 항구에 멈추어 선 두 개의 뱃고물이 물결을 안고 넘실대듯 부드럽게 흔들렸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그녀의 다리에는 피곤함이나 짜증 전혀 없고 마냥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점심시간이 벌써 끝난 것도 사무실로 돌아갈 일도 모두 잊은 채 희고 아름다운 그녀 다리만 쫓아갔네 도시의 생지옥 같은 번화가를 헤치고 붉고 푸른 불이 날름거리는 횡단보도와 하늘로 오를 듯한 육교를 건너 나 대낮에 여우에 홀린 듯이 따라갔네 어느덧 그녀의 흰 다리는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공동묘지 같은 변두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네 나 대낮에 꼬리 감춘 여우가 사는 듯한 그녀의 어둑한 아파트 구멍으로 따라들어갔네 그 동네는 바로 내가 사는 동네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그녀는 나의 호실 맞은편에 살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며 경계하듯 나를 쳐다봤다 나 대낮에 꿈길인 듯 따라갔네 낯선 그녀의 희고 아름다운 다리를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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