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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공광규 시인 / 망가진 기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31.

공광규 시인 / 망가진 기계

 

 

허겁지겁 출근하는 나를

앞집 개가 짖지도 않고

멍하니 쳐다본다

 

"망가진, 덜그럭거리는,

감가상각이 끝나 가는 기계가

겨우 굴러가고 있구나"

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나보다

 

개도 거들떠보지 않는

나는

이 밀림의 누구인가

 

생산성과 헐떡이며

성교를 벌이고 있는

나는.

 

 


 

 

공광규 시인 / 늙은 집

 

 

머위 등나무꽃, 칡순이 움트며 내려다보는 길이

가는 실처럼 겨우겨우 물길 따라 이어지는

척산에서 이 십리 심수 골짜기에

늙어서 등이 굽은 기와집 한 채가 누워있다

 

햇빛이 너무 무거워서 내려앉은 마루

바람이 하도 드나들어 어긋난 문짝

급한 빗발이 방안을 엿보다가 부러뜨린 문살

세월의 이빨이 흑벽을 뜯어먹고 있다

 

토끼똥 노루똥이 수북한 마루 밑에는

산짐승들이 몇 날 몇 밤 사랑을 나누다 간 다정한 흔적

썩어 가는 기둥 옆 호로병은 입술이 깨져서

옛이야기를 한마디도 들려주지 못하겠단다

 

망가진 샘터에는 미나리가 저 혼자가 크고

마당을 덮은 풀들이 변소까지 달려가

푸른 똥을 누고 있는 것을 늙은 감나무만

옛날 그 자리에서 구부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시간의 망치가 깨뜨리는 기왓장 소리에 놀란

구렁이는 밤마다 지붕 위에 올라

햇빛과 바람과 하염없는 물소리를 원망하며

용마루에 서러움의 길이를 대볼 것이다.

 

 


 

 

공광규 시인 / 孔처사 전상서

 

 

뒤꼍 대숲 건너가는 빗소리

산등성이 파도쳐 오는 솔바람소리 데리고 앉아

눈 푸른 당신과 차 나누며

마음속 구름 확 열어 젖혀본 게 언제였던가

올 겨울 폭설에 갇혀

세간에서 보내온 잡문은 읽지도 않고

백김치 국물 뚝뚝 떨어지는 공양 짓다말다

끄떡거리는 헌 經床을 천수경으로 받치고

經을 읽다 말다 하다

나무부처 도끼로 찍고 시줏돈으로 불 쏘시게 하여

몸이나 훈훈히 지피다가

저 순백의 本地風光으로 먼저 갑니다

그러니 눈 녹으면 여름 장마에

떠내려간 다리를 대신하여 돌부처 끌어다가

거기 산문 밖 사람들 쉽게

절에 오르도록 징검다리 놓아주세요

내 시신을 찾느라 인력을 낭비하지 말고

장작을 없애 사리도 수습하지 말며

비석과 부도로 기억하지 말아

살은 짐승과 벌레의 먹이가 되고

뼈가 부서진 자리에 풀 한 포기 자라게

그냥 내 버려두세요.

 

 


 

공광규 시인

1960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 1986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학일기』, 『마른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말똥 한 덩이』 등과 시론집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 그리고 논문집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등이 있음. 제1회 신라문학대상과 제4회 윤동주상 문학대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