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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튀빙겐 가는 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7.

조정권 시인 / 튀빙겐 가는 길

 

 

□ 길편지

 

겨울 서주(序奏)를 알리는

눈송이의 춤

 

나는 평생을 갇혀 있을 것이다

암벽(岩壁)도 면벽(面壁)도 없는 길에

 

□ 하얀 다리

 

대지가 얼고 강이 얼고 마을이 얼고

 

하느님이 하얀 색칠을 해 놓으셨다

 

창문을 열면

 

가이없는 높이 위에서 흰 봉우리가

넋을 빼앗는다

 

오, 밤 사이 하느님이

하얀 다리를 새로 놓으셨다

 

나는 걸어 들어간다

하얀 다리 위를

 

현실보다 현실다운 저 다리를

 

마을의 속살이 하얗다

 

(어느 해 겨울 한밤 자명(慈明)과 직지사(直指寺) 지날 때 도피안교(到彼岸橋) 그냥 넘기 죄송해 나 혼자 여관방으로 내려가 얼음물로 턱수염 밀어버리고 이튿날 아침 지나갔지)

 

나는 길에게 패스포트를 보이고

통과한다

 

뒤에서 길이 껄껄 웃는다

`나는 가치없는 영혼만 통과시키지'

 

(공산(空山)의 솔방울은

산(山) 전체를 울리지)

 

마왕(魔王)은 나를 불러 세워 놓고 주머니를 뒤진다

하얀 가루는 없는가

 

(그대, 허적(虛寂)의 세계를 아는가?)

 

□ 밤 한시의 횔덜린하우스

 

하얀 시트 위에 백랍같이 탈색된 장미가 앓고 있다

 

천장 위에 매단 링겔병에서 밤의 붉은 혈액이 조금씩 줄고 있다

 

수술용 가위가 장미줄기를 잘랐다가 급히 봉합을 서둘고 있다

 

창 밖에서 말대가리가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하얀 방 한가운데 나무의자가 밤샘을 하고 있다

 

화병 속에서 노오란 꽃봉오리가 혼자 밤샘하고 있다

 

밤의 흰 붕대가 금시 붉어졌다 창까지 붉어졌다

 

소리내지 마라

 

신(神)이 버린

불덩어리 아들 미쳐 연소(燃燒)하느니

 

□ 봉함된 땅, 대지, 강을 거닐며

 

잿구덩이를 들치며 너를 찾는다

너는 거기에 없다

 

눈구뎅이를 파헤치며 너를 찾는다

파아랗게 퍼진 싹들, 거기에도 너는 없다

 

돌구뎅이를 들치면서 너를 찾는다

악문 뿌리들, 너는 거기에도 없다

 

얼음구뎅이 얼음장을 깨뜨리며 너를 찾는다

오, 얼음 속 거기

 

활활 갇힌 불덩어리

너는 거기에 있다

 

□ 저녁 숲

 

내 마음 뒤에서 저녁 숲이 노래하기 시작한다.

 

나는 예감한다. 이제 얼마 있으면 집집마다 경허하게

내건 등불들이 밤을 지배하는 계절이 다가옴을.

나는 걷는다. 마음의 조그마한 등잔을 받쳐들고.

어둠을 지배하는 어둠이 있는 전나무숲 속에는

살아 있는 가지를 해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피해 가던

성자(聖者)들의 샛길이 있다.

빈궁 속에서 소박함의 본질을 수행하며

영(靈)으로서 영(靈)을 느끼는 이들.

마음과 몸과 입술과 온 생명으로 침묵을 노래하는 이들.

궁핍한 시간 속에서 눈부신 화환을 엮어

누군가의 어깨에 얹어주듯

환한 햇빛의 시간 속을 왕래하는

축복자들, 시인들.

성탑 앞에 이제 멈추어 선 자여.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 있고

너는 낯익은 문가에서

맨발로

땅에 입맞추며 언 별을 올려다본다.

너의 눈길은 좀더 추운 날들을 향하고

바람에 해진 옷자락 펄럭이며 너를 지나쳐 간다.

네가 건너간 다리는 벌써 어둠에 잠겨 버린다.

 

내 마음 뒤에서 뒤늦게 딸랑별이 노래하기 시작한다.

 

□ 내 몸의 천국

 

당신이 독일 여행중 스투트가르트 지방을 지나게 된다면 튀빙겐 마을에 들러 외짝눈 당나귀를 만나 보라.

그 당나귀는 사람의 얼굴과 닮아 있어 곧 눈에 띌 것이다.

당나귀 주인은 관광객들을 향해 늘 꼭같이 외친다.

`자, 이 당나귀는 울 안에서 열흘 동안 갇혀 살며 줄곧 굶는 묘기를 보여왔습니다.

보십시요, 이 비루먹고 뼈만 남은 짐승을.

제가 이 가련한 나귀에게 시험삼아

호밀을 조금만 먹여 보겠습니다.

만일 이 짐승이 입에 호밀을 댄다면

두 배의 돈을 돌려드리겠습니다.ꡑ

`자 여러분, 돈을 거십시요. 이 당나귀는 일주일까지는 굶고도 견딘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더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관광객들이 돈을 걸지만

당나귀는 먹지 않는다.

맛있는 홍당무를 누군가가 코앞에 바치지만

머리를 돌려 버린다.

당나귀는 먹는다는 것에 깊은 수치심을 갖고 있다.

만약 당신이 독일 여행중이라면 굶어죽는

당나귀를 찾아보라.

그 당나귀는 넥카 강이 흐르는 튀빙겐 마을

횔덜린이 미쳐서 살던

뾰죽집 뒤 거대한 전나무 그늘 밑에서 웅크리고 있다.

당신은 한눈에 당나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 눈의 불꽃을 보는 순간 당나귀가 먼저 당신을 찾아냈음을 알게 될 거다.

그는 눈을 감는다.

고개를 돌린다.

그는 몸 안의 굶주림을 키워 수치심을 막는다.

그를 먹여 살리는 것은 노여움.

그가 입을 벌려 먹으려 할 때 공중에서 낚아채버리는

이 현실.

호밀을 흔들어대는 이 현실.

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호밀을 눈앞에서 밟아버리고 조롱하는 이 현실이

나에게는 또하나의 악몽 같다.

 

□ 내 몸의 지옥

 

검은 교각 밑으로 불행한 몸뚱어리가 뛰어 내린다.

이국(異國)에서 맞는 첫 추위처럼 네 시의 첫 구절을 시작하라.

지상에서 열매 머무는 날 길지 않으니

지상의 마지막 노래

입가에 머금어라.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에게 일생 술을 권하리라

너의 손목에 일생 진눈깨비를 뿌리리라.

입가에 미소를 지우리라.

 

너는 이 지상의 마른 꽃다발 하나 들고

오래오래 서 있으리라.

받을 사람들은 벌써 지나갔으며

네가 보낸 무수한 불면의 어둠이 쇠창살 같은

검은 숲을 이루어 밤을 덮치나니

너는 진정 마지막 노래 준비했는가.

 

매의 날개는 헌 헝겊 같은 것.

그 헝겊날개를 양 어깨에 달고

먼 동양(東洋)에서

날아온 너는 12월의 밤을 잠 못 이루다 문득

호텔 문을 밀치고 나와

넥카 강변을 거닐며

시시한 맥주보다

소주를 그리워하며

두 명의 횔덜린을 생각한다.

한 사람은 살아 생전 죽도록 불행했던 무명(無名)의 횔덜린이고

또 한 사람의 횔덜린은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된 사후(死後)의 횔덜린.

너는 진정 어느 횔덜린이 되기를 원했느냐

머리를 돌바닥에 짓찧는다.

그 둘보다 잘 먹고 오래오래 살고 있는 너는

무엇인가 잃긴 잃었다.

돌아가거라.

이제부터 진정 너는 네 삶의 첫 추위처럼 시의 첫 구절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

부리 위로 퍼붓는 진눈깨비 언어로.

 

□ 뻘밭에서

 

친구들

전화번호 오래 전에 지웠다.

깊은 뻘밭 밑바닥으로

들어 앉은 붕어가 되었다.

진흙처럼 퍼져 있는 이 마음에

무슨 길 있겠느냐.

육고간(肉庫間) 같은 이 머리통

뻘밭 속으로 처넣었다.

좀더 시커멓게

뻘밭 속으로 퍼져 있겠다.

몸에 무슨 길이 있겠느냐.

머릿속에 뻘흙 가득 처넣고

나는 나를 잠궜다.

친구들

나는 내 속에서

발광(發光)할 시간이 필요하다.

 

□ 흙을 위한 칸타타

 

내 육신을 봉인(封印)하시는 이여.

내 몸을 긍휼히 여겨

서늘한 가랑잎으로

썩혀주시옵고

가여이 여겨

먼 들 딸랑종소리와 함께

뿌려 주옵소서.

세상을 긍휼히 여기신 이

종말은 뜻대로 하소서.

아침에 맺은 이슬

햇빛 속 다시 돌려드리오니

돌아가는 이 길

먼저 가옵신 그분 가시밭길 비하면

아무 뜻 없사오이다.

 

지상에 맺힌 이 몸

뜻대로 맡기오이다.

이 눈물 거두어 가옵소서.

이 육신 풀잎 위에서조차

너무 무거웠던 이슬,

그분의 눈물 한 방울 받치지 못했나이다.

이 육신 땅 위에서는 너무나 무거운 사슬,

그분의 탄식만 들었습니다.

내 눈을 봉인(封印)하시는 이여.

서늘한 가랑잎으로 입술 대주시는 이여.

내 눈물 사하여주시옵고

내 죄를 거두어주옵소서.

 

신성한 숲, 문학과지성사, 1994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