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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기다려지는 카톡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7.

황인숙 시인 / 기다려지는 카톡

 

 

언제부턴가 카카오록을

자주 들어가게 되고 귀 기울이고

기다리게 된다 친구가 매일 보내오는 카톡

아름다운 시어와 아름다운 영상

사랑의 시어들 속에  빠저들어

마음 저리게 감동으로

잔잔하게 파도치는

영혼을 흔드는 시어들

기다려 지는 카톡 귀 기울이고

친구 에게서 보내온 카톡

또 다른 친구 에게 카톡을 보낸다

 

 


 

 

황인숙 시인 / 길

 

 

『내셔널 지오그래픽』 포스터 속의 길은

피려는 것인지 지려는 것인지 모를

꽃송이들을 단 잡목 덤불 사이로 나 있다.

아마 지려는 것인 햇빛 아래

잔돌이 구르는 비탈이다.

온기가 가시지 않은 그 길은 멀리

안개와 구름에 싸인 산맥들과 하늘로

시선을 이끌어, 떨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 시선이, 책방을 겸한 문구점이 있는

길거리의 길 위로 돌아오자마자

누군가 나를 향해 돌진하듯, 튀어오른다. 마주 걸어오는

그의 몸의 길은

험준하게 뒤틀려 있다.

안개와 구름에 싸여.

 

그 길 위에서, 그의 얼굴은 정면을 향해 있고

그의 눈의 길은 곧다.

그래서, 그의 바른 자세는

더욱 비틀려 있다.

힘껏 튈려고

휜 스프링처럼.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꿈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황인숙 시인 / 꿈들

 

 

꿈에 나는

타이티나 지중해 아니면

제주 바다를 향해 떠난다

그런데 꿈에 나는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 혹은 대합실에서

시간을 다 보낸다

 

꿈에 나는

거울을 본다

젊고 아리땁다!

나는 하염없이 거울을 본다

꿈이냐 생시냐 의문도 없이

그러다 잠이 깨면

거울을 본다

젊어서 뭐 할 건데?

별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딱히 할 일은 없다

 

꿈에 나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꿈은 한 권의 책이다

꿈에서도 글자가 가물거려

이따금 나는 등장하지 않는 눈을 가늘게 뜬다

글자를 쓰다듬는 눈의 감각

문장을 핥는 뇌의 감각

끝내주는 글이군, 끝내준다

책장이 넘어간다

그러다 잠이 깬다

그 책이 아직 꿈속에

그대로 있을까.

꿈에서 읽은 책은 누가 지은 것일까?

 

꿈에 나는

하늘 흐린 바닷가에서

탐스럽게 커다란 조개들 본다

모래 속에 조개들이 지천이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정신 없이 조개를 줍는다

앞자락이 축 늘어지도록 조개를 주워 담는다

그러다 잠이 깬다

꿈인 줄 알았으면 바다나 실컷 볼걸

 

내 친구는 이런 꿈을 꿨다

구름의 거대한 성곽

위에 커다랗게, 커다랗게

떠오르는

S-A-N-T-A M-A-R-I-A

하늘의 파아랑! 구름의 하아양!

터지는 심장!

 

 


 

 

황인숙 시인 / 꿈에 깨다

 

 

그것은 마른 꽃잎처럼

얇고 아주 가볍다.

 

쓰디쓴 수액으로

아리고 통통하던

때도 지나고

 

이제 기억에도 없다.

 

물결에 흘러가다

찰나, 어른거렸는데

 

모르겠다.

언제였는지, 왜 그랬었는지,

그러기는 그랬었는지,

모르겠다.

누구였는지, 나였는지

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꿈을 꾸기는 꾼 것인지.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