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양해열 시인 / 인간의 설계도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7.

양해열 시인 / 인간의 설계도

-게놈지도1

 

 

  1.

 

  선암사 대웅전 지붕해체공사를 하다 천정칸막이 금강송 판자에 쓰인 바다 해(海) 자와 물 수(水) 자를 보았지요 웬 바닷물? 살고 있는 여기가 화엄(華嚴)의 바다라는 뜻이다! 원주스님은 까까머리에 알밤 먹이고 사흘을 굶겼지요 그때 뱃속에 새겨진 해도(海圖)가 내 삶의 짜디짠 지도였을까요 나는 잘게 쪼개져서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해독되어 왔어요 몇 개이고 어디일까요 나는? 아직은 모르겠어요

 

  2.

 

  게놈? 꽃게가 슬퍼할 일이 아니에요 바다 속에 앉아 K(54세, 한국인)의 유전자 도면을 읽었지요 엄지손가락에서 빼낸 그의 피 한 방울 속으로 들어가 알파벳과 아라비아숫자를 타고 갈 데까지 가보았어요 한데, 디엔에이란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 네 가지 염기(鹽基)로 빚어진, 결국 간장이더군요 30억 개의 K를 이제 다 알겠어요 그가 이런 이야기도 하더군요 간장 속에는 콩이 있고 햇볕이 있고 쏟아지는 비와 내리치는 천둥벼락이 있다고

 

  그러니 사람도 마찬가지, 시커먼 놈 하얀 놈 누런 놈, 급한 놈 느려터진 놈, 짠 놈 싱거운 놈, 열 많은 놈 차가운 놈, 제각각 태어났다고

 

  허나, 원한다면 바꿀 수 있으니 그려진 그대로 살 필요는 없다고 어허, 팔자소관은 어디에도 없는 거라고

 

  3.

 

  그래요 남 몰래 눈물 흘리고 땀 흘려 나(我)를 키워 가면 자신의 설계도도 바꿀 수 있지 않겠나요 눈부신 과학문명 때문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저 전설의 대륙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지 않겠나요

 

웹진 『시인광장』 2009년 겨울호

 

 


 

양해열 시인

전남 순천에서 출생. 2006년 《애지》신인상 〈미늘〉 外 4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순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과 재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