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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이체 시인 / 어느 착한 사람의 로드킬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7.

이이체 시인 / 어느 착한 사람의 로드킬

 

 

  너는 도로 위의 무법자, 시속 백만 킬로미터로 도주하는 철없는 사륜구동의 도망자. 나는 언제나 주저앉는 것에 익숙했고 너는 달렸다. 벽은 어디에나 있지. 그러나 벽을 차로 쳐 죽이며 달리는 건 나쁜 시대의 가장 착한 탈주. 네가 운전하는 레이스에서 나는 눈멀고 귀멀어서 합승을 거부할 수 없었지. 날 것은 언제나 보인다. 우리 차로 들이받은 찰나들이 피를 철철 흘려도 만족감은 언제나 빠른 속도로 사라졌지. 마냥 행방불명으로 처리되는 사고의 쾌감들. 항상 날 것으로 날 것을 외면할 수 있었다. 도망칠 수 있는 공간에서, 사라질 수 있는 곳으로.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던 기억들. 너는 네가 최선을 다해 달릴 수 있을 때 사랑에서 도주했고, 그거야말로 화양연화. 나는 네 속도감을 함께 즐기지 못해 무단으로 하차해 버린 낙오자, 가장 느린 주법의 기형아. 내 장애는 액셀러레이터 없이 브레이크만 가졌다는 거. 나는 달리지 않아서 네게서 딱지를 받았지. 이제라도 나는 나쁘게, 빠르게 달리려고 때깔 좋은 선글라스를 쓰고 반짝 빛나는 람보르기니를 타고 폼 나게 벽을 치받아 죽이고. 너에게 가려는데 얼굴이 없다 얼굴이 없다. 딱지는 나쁜 거야, 낙인이라고. 늦게나마 뒤돌아보는데 백미러 너머, 피 묻은 아스팔트 도로에 널브러진 벽의 주검들. 네 표정들 같은.

 

웹진 『시인광장』 2009년 겨울호 발표

 

 


 

이이체 시인

1988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2008년 《현대시》에 〈나무 라디오〉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