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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단추를 채우면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7.

천양희 시인 /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천양희 시인 /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 시인 / 들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천양희 시인 / 마음의 경계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 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 검은 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이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천양희 시인 / 마음의 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천양희 시인 / 마음의 벽

 

 

침묵의 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나무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가지가 되지 못하고

자꾸 나누어지는 걸까.

말로는 함께 살자면서 살기는 따로따로다.

사람의 에고(ego)가 은행 열매보다 더

단단한 것일까.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사람사이의 벽을 만든다.

벽이 있는 한, 한가지로 함께 잘 살기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무도 가을 나무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더 춥다고 한다.

사람사이의 벽도 너무 높고 두터우면 그곳은

늘 그늘이지고 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 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했다. 1996년 소월시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11년 제26회 만해문학상, 2014년 제9회 불교문예작품상, 2017년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