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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천양희 시인 /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 시인 / 들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천양희 시인 / 마음의 경계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 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 검은 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이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천양희 시인 / 마음의 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천양희 시인 / 마음의 벽
침묵의 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나무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가지가 되지 못하고 자꾸 나누어지는 걸까. 말로는 함께 살자면서 살기는 따로따로다. 사람의 에고(ego)가 은행 열매보다 더 단단한 것일까.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사람사이의 벽을 만든다. 벽이 있는 한, 한가지로 함께 잘 살기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무도 가을 나무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더 춥다고 한다. 사람사이의 벽도 너무 높고 두터우면 그곳은 늘 그늘이지고 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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