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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과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6.

 

오세영 시인 / 과일

 

 

칼로 벗겨져서

과일이 과일 되듯

 

잉크에 적셔야만 비로소

시(詩)가 되는 나의 시(詩),

 

새벽녘 깨어

시(詩)를 쓴다.

 

칼날 앞에 옷 벗겨

떠는 과육(果肉)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알몸에 대는 칼,

 

진한 커피를 마시며

어두운 새벽을 벗긴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그 사람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오세영 시인 / 그릇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圓)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그릇 2

 

 

꽃은 시들고

물은 마르고

깨진 꽃병 하나,

어둠을 지키고 있다.

 

아, 목말라라.

금간 육신(肉身).

세시에 깨어 자리끼를

찾는

꽃병은 귀가 어둡고,

 

세상은 저마다의

꽃들이다.

깔깔 웃는 백일홍(百日紅)

킬킬 웃는 옥잠화(玉簪花).

 

세시에 깨어

귀를 모으는

금간 꽃병 하나.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그릇 3

 

 

흔히

가슴에 불덩이를 안았다고

말한다.

겨울에

언 손을 녹여 주는

화로(火爐).

잿 속에 묻힌 불씨를

찾으며

밤을 지샌다.

목숨이란

불 담긴 그릇.

욕망의 심지를 낮춰야

삭지 않고

영혼(靈魂)은

불 꽃 위에서만 꿈꾼다.

불질러 다오.

내 가슴은 식었구나.

새끼 잃은 암노루의 눈빛같이

불질러 다오.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 받음. 1968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 충남대학교 (1974~1981)와 단국대학교 (1981~1985)에서 국문학을,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과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이 있음. 한국시학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 녹원문학상 평론부문(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2000), 현대불교문학상(2009)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