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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과일
칼로 벗겨져서 과일이 과일 되듯
잉크에 적셔야만 비로소 시(詩)가 되는 나의 시(詩),
새벽녘 깨어 시(詩)를 쓴다.
칼날 앞에 옷 벗겨 떠는 과육(果肉)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알몸에 대는 칼,
진한 커피를 마시며 어두운 새벽을 벗긴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그 사람
저녁에 팔 베고 누워 흐르는 계곡에 귀 기울이면 거기 카츄샤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꽃잎으로, 꽃잎으로 흐르다가 드디어 물이 된 그 사람.
자정에 목침을 베고 누워 솔잎 스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면 어린 월명이 누이와 이별하는 소리가 들린다. 갈잎으로, 갈잎으로 날리다가 어느덧 바람이 된 그 사람.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 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무슨 부질 없는 독경 소린가. 이 무슨 부질 없는 목탁 소린가.
새벽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댓잎의 이슬 맺는 소리에 귀기울이면 출가하는 싯달다의 뺨에서 떨어지는 눈물 방울 소리가 들린다. 안개로, 안개로 흐르다가 이제 하늘이 된 그 사람.
오세영 시인 / 그릇 1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圓)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그릇 2
꽃은 시들고 물은 마르고 깨진 꽃병 하나, 어둠을 지키고 있다.
아, 목말라라. 금간 육신(肉身). 세시에 깨어 자리끼를 찾는 꽃병은 귀가 어둡고,
세상은 저마다의 꽃들이다. 깔깔 웃는 백일홍(百日紅) 킬킬 웃는 옥잠화(玉簪花).
세시에 깨어 귀를 모으는 금간 꽃병 하나.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오세영 시인 / 그릇 3
흔히 가슴에 불덩이를 안았다고 말한다. 겨울에 언 손을 녹여 주는 화로(火爐). 잿 속에 묻힌 불씨를 찾으며 밤을 지샌다. 목숨이란 불 담긴 그릇. 욕망의 심지를 낮춰야 삭지 않고 영혼(靈魂)은 불 꽃 위에서만 꿈꾼다. 불질러 다오. 내 가슴은 식었구나. 새끼 잃은 암노루의 눈빛같이 불질러 다오.
모순의 흙, 고려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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