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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인 / 베드로 1
컴컴한 하늘에서 드럼통 터지는 소리 들리고 거리에는 콜타르 같은 빗물이 흘러 넘쳤다 베드로는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떨어뜨린 생선을 다시 주워 안았다 바야흐로 탱크 같은 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과물(果物)이 도시의 골목 골목에서 굵은 땀방울들을 체포하고 있었다 그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정했다. 베드로는 점령지구로 나아가 입과 눈을 반납했다 평생을 바다에서 늙을 작정이었다
베드로는 이제 중년이 되었고 머리도 벗겨졌다 그동안 자식새끼와 마누라까지 두었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 등허리에 과녁판을 짊어지고 태어난다는 사실 자식새끼와 마누라에게도 어김없이 창끝이 휘뚝 날아간다는 이 넌더리 나는 상식 그는 상식을 존중하기 위해 오늘도 더 멀리 바다로 나간다 그의 소원은 부둣가에 차려놓은 어물전이 더욱 번창하기를 기대하는 것뿐이다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베드로 2
바람도 안 부는데 피 한 방울 짓이겨져 있다
짓이긴 자리에 피 한 방울 새로 돋아 있다
짓이긴 자리에 피 한 방울 또 돋아 있다
못은 왜 생기는 것일까 이 발바닥에
못은 왜 어두워져가는 암흑일까 이 손바닥에
아무리 못을 잘라내도 못은 자란다 새 못이 자라 오른다
핏방울은 왜 돋아나는 것일까 이 발바닥에
핏방울은 왜 돋아나는 암흑일까 이 손바닥에
못을 잘라낸 자리에 한 방울씩 돋아 오르고 한 방울씩 굳어져 간다
피는 짓이겨져 있다 피는 짓이겨져 있다
짓이긴 피에서 새 피 한 방울 다시 돋아 나오고 굳어서 못이 된다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베를린 통신(通信)
1
동서를 가로막던 브란덴부르크 담장벽이 무너져 있다. 두 쪽의 손이 38선을 철거한 것이다. 광장에서는 구스타프 말러의「부활」교향곡이 연주되었다. 철조망은 비둘기의 이름으로 저주받았다.
2
제국(帝國) 국회의사당 광장에 겨울의 콘테이너들이 정박(碇泊)하고 있다. 동구에서 하역한 얼음덩어리들이 추위를 일찍 불러왔다. 서독인들은 말한다. 수탉이 흐린 하늘을 보고 대낮에 새벽을 알린 것이라고.
3
훔볼트 대학에서 박완서(朴婉緖) 소설을 번역하는 헬가 피히트 박사를 찾아간다. 교수 식당과 학생 식당이 구별이 없다. 서울에서도 만났던 그녀는 이제 교수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원탁 회의실로 불려가 신분을 박탈당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이 나뿐인가 항변은 분노에 가깝다.
4
자유(自由) 서베를린 대학이 훔볼트 대학을 접수하리라는 소문이다 통합이 아니다. 도이치 오퍼와 슈타트 오퍼가 기구축소를 놓고 긴장하고 있다. 브레히트 극장은 사실상 문을 닫았다, 엄청난 동독의 예술가들이 실업하고 있다. 내가 만났던 시 문화장관은 문화예산 적자수치를 밝히기를 꺼려한다.
5
거대한 자석의 팔을 가진 터미네이터가 담장 저쪽으로 기계팔을 내뻗고 있다. 사과나무의 사과가 밀가루가 사회주의 포장이 씌어진 채 재교육장으로 옮겨지고 있다.
6
저녁 네 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부란덴부르크 광장 동쪽 구역. 터키계 노점상들이 죽은 불빛을 켜 놓고 도깨비시장을 연다. 피에 젖은 자유(自由)의 벽조각 소련 군모, 사회주의 털모자들이 눈발을 쓴 채 거래되고 있다.
7
밤 아홉 시, 상가의 불빛이 철수(撤收)한 시내 중심가. 맨 대머리의 신(新)나치 청년 몇몇 나를 노려보고 지나가고 있다.
신성한 숲,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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