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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희성 시인 / 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6.

정희성 시인 / 길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空氣)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自由)여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넋두리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시만 쓰면 다냐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남들이 술값 낼 때

구두끈만 매면 다냐

나라가 꼬이면

말이 어지럽고

말이 헷갈리면

넋도 달아나느니

네 말은 뉘 집 개가 물어 가서

거렁뱅이 맨발로 떠도느냐

헷갈리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한국어가 아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눈 덮인 산길에서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깊이 깊이 사랑을 새겨두리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19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답청(踏靑)』(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시를 찾아서』(2001) 『돌아다보면 문득』(2008) 등과 그 밖에 『한국현대시의 이해』(共著) 등이 있음.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과 1997년 시와시학상, 불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 2014 제5회 구상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