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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 / 길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空氣)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自由)여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넋두리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시만 쓰면 다냐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남들이 술값 낼 때 구두끈만 매면 다냐 나라가 꼬이면 말이 어지럽고 말이 헷갈리면 넋도 달아나느니 네 말은 뉘 집 개가 물어 가서 거렁뱅이 맨발로 떠도느냐 헷갈리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한국어가 아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눈 덮인 산길에서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 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깊이 깊이 사랑을 새겨두리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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