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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시인 / 용정 가는 길
들뿐인 구릉 위에 서니 하늘이 넓어 내가 잘 드러난다
광야엔 굉장한 넓이의 침묵이 고요의 굉장함이 날 보고 뭔가를 말하라고 긴장해 있다
숨을 수 없어 `나는 한국인!'이라 소리치니 내 소리가 두 말로 갈라진다 저 아래서, 서로 맞받는 메아리처럼 두 말이 솟구쳐올라 서로 부딪쳐 피 흘린다
돌아보니 마른 수수밭머리에 큰 바람이 먼지를 말아올린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원통리 1
전쟁은 모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일으키고 내던졌다. 원통리 민둥산의 완만한 능선 밑에 엎드린 흉기를 덮으며 사방으로 뻗는 풀들을 달래는 흙들. 흙들 속에서 때때로 터지는 폭탄들이 풀들의 다리 짜르고, 풀덤불 속 잠자는 토끼의 귀를 찢는, 밤낮으로 쌓인 재들만 날리는 산. 무덤들의 주인들도 혼비백산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찬비 내려 눈 녹는 오월, 묻혀 있던 쇠들 솟아나 골짜기마다 죽인다 죽인다는 말들만 짙어진다. 병사들이 심심풀이로 잡다 놓친 노루, 쇠들에 걸려 넘어지고, 골짜기 음지에 수줍게 남은 잔설이 노루가 밟은 지뢰에 놀라 흩어진다. 산 아래는 죽인다는 말로만 덮어 오는 신록, 바람도 산등성이를 넘자 살기등등해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유리 속의 폭풍
구름이 푸른 갈기를 휘날리면서 전신주를 꺾는다. 흰 기둥들은 꺾인 채 완강하게 서 있고, 전선들은 끊어진 채 전신주와 구름 사이를 토막토막 잇고 있다. 그 아래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가 뭉쳐진 채 솟아오른다.
신호등 아래서, 솟아오르는 은사시나무의 윗가지 너머 푸른 신호등이 건너 편 인도 위로 켜지길 기다린다. 푸르고 노란, 또는 남빛의, 검은 차들은 은사시나무 새로 솟는 윗가지 위로 솟아오르는 소리만 뒤섞으며 나의 앞을 어지럽게, 어디론가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또는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또는 그런 곳들로부터 와선 또 어디론가로 가버린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길 건너 온통 거울로 벽을 바른 금융회사 육 층 건물의 거울 속에 비쳐 있어야 한다. 폭풍의 구름 아래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 아래 너무 어두워 이 쪽에선 보이지 않지만 나는 조그만 덩어리로 비쳐 있어야 한다.
구름의 갈기가 뒤섞이면서 전신주가 꺾인다. 심상치 않는 폭풍이 오려나보다. 내가 길을 건너갈 때에도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의 덩어리 아래로 나는 보이지 않고 검기만 한 그 속에 푸른 신호등만이 켜져 있다. 푸른 신호등 아래 은사시나무 가로수와 나는 안 보인다. 다만 빨리 건너가야 할 뿐이다. 건너가서 재빨리 저 유리를 빠져나가야 할 뿐이다. 나는 그 속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 눈에 내가 안 보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휘젓는 폭풍을 그 속에서 보았으니까.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이하석 시인 / 은종이
바브민트의 옷을 벗긴 다음 소년은 철조망에 반짝이는 천사를 달아 두었다. 봄이 와서 소년의 주머니 속 뽀빠이가 팔을 올리듯이 천사들의 치맛자락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다시 로보트 태권 V를 철조망에 매달았다. 철조망 안 어두운 몸들을 세운 풀들 위로 로보트 태권 V는 철권을 흔들고 작년의 은종이 천사들이 찢긴 날개로 혼곤한 세상의 봄 속을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그 봄을 사랑했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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