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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시인 /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부제: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 민음사, 1988
장정일 시인 / 물 속의 집
냇물 속에 집이 있다. 냇물 속의 집은 물풀에 싸여 아늑하고 잘 씻은 자갈 위에 기초 놓아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어질고 순한 꽃게와 송사리떼가 물 속의 집을 들날락거렸다. 언제나 나는……물…… 속의 집에 가고 싶었다. 그 집에 들아가 밀린 때가 굳은 등짝을 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고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문을 연다. 물의 고리를 잡고 문을 연다. 열리지 않는다 문도. 물도.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어리석은 심사에는 내가 열려는 문고리가 물에 실려 자꾸 떠내려가는 듯이 보였다. 아니면 출렁이며 물무늬가 생기는 만큼 열어야 할 문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못다 연다는 것일까. 또는 물 속의 집 속에도 왼쪽 목에 무서운 칼집을 가진 나와 같은 한 불행한 청년이 있어 내가 당기는 문을 맞잡고 물 속의 문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인가.
언제나 나는. 갈 수 없는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고 집은 점점 붉게 흐린 황혼 속으로 깊어졌다. 그리고 연꽃송이가 불타오르듯 하나. 둘, 물 밑에서부터 별들이 돋아났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물 속에 잠겨 있던 집이 수천 허공을 가로질러 앞산 중턱에 날아가 박혔다. 험한 산. 아궁이 지피는 불쏘시개같이 끝이 까만 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은 산중턱에 물 속의 집이 있었다. 아, 모든 건 환영이었구나! 나는 무안해서 물에 젖은 발목을 마른 흙에 비벼 닦았다.
갑자기 그 집에서 울리는 듯한 개 짖는 소리가 이오처럼 들렸고 밥 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끌어당겼다. 그렇습니다. 나르시스가 살러 간 것같이 우리가 물 속에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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