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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꽃 피리
채워도 채워도 목마른 마흔 살 육신(肉身)의 갈대 꽃 입술.
바람에 울고 있는 갈대 꽃 피리.
눈 뜨면 지금은 화사한 5월(月), 수국(水菊)의 향기로 너는 웃는데
채워도 채워도 못 다한 마흔 살 육신(肉身)의 긴 목마름.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나무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 설 때를 알 듯
오세영 시인 / 난(蘭)을 기르며
난(蘭)을 기르며 한 겨울 난다.
밖에는 여인(女人)의 원한(怨恨) 같은 서릿발이 치고 사는 것이 서럽다고 서럽다고 눈보라 에우는데, 병(病)든 지어미의 머리맡을 다소곳이 지키는 한 포기의 난(蘭), 난(蘭)은 겨울을 먹고 사는 꽃이다.
꽃을 꺾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은 난(蘭)을 기를 일이다.
여윈 암노루 사향(麝香) 찾아 떠나간 빈 골을 싸늘한 향기(香氣)로 피어나는 꽃.
난(蘭)을 기르며 보낸 한 철은 서러운 듯 서러운 듯 아름다워라.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날개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어느 때 새를 맞춘다.
타버린 의식체(意識體)가 되어 언덕 너머 떨어지는 낙과(落果). 번득이는 비늘로 휩싸이는 의문(疑問)들.
문을 밀치면 거기 놓인 십자가에 문득 와서 꽂히는 화살, 온 밤을 피가 흐르고 경험의 뜨락에 저버린 잎새들이 앙상한 그림자로 창가를 드리울 때,
한 마리 새가 문법의 가지를 차고 오른다. 난다. 파열하는 꽃잎 속을, 시간의 폭동 속을, 아아 뜨거운 수소이온. 그 부력(浮力),
날카로운 바람을 몰고, 한 소절(小節)의 아침을 건너 햇살이 파도치는 바다에서 인력을 끊고 솟아오른 한 개의 램프.
드디어 타버린 육체의 아픔 위에 부리로 대낮을 깨면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어느 때 내 가슴에 와 꽂힌다. 아아 빛을 털고 일어서는 한 마리의 새.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라일락 그늘 아래서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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