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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세영 시인 / 꽃 피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8.

오세영 시인 / 꽃 피리

 

 

채워도 채워도

목마른

마흔 살 육신(肉身)의

갈대 꽃 입술.

 

바람에 울고 있는

갈대 꽃 피리.

 

눈 뜨면 지금은

화사한 5월(月),

수국(水菊)의 향기로 너는 웃는데

 

채워도 채워도 못 다한

마흔 살 육신(肉身)의 긴

목마름.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나무처럼

 

 

나무가 나무끼리 어울려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가지와 가지가 손목을 잡고

긴 추위를 견디어 내듯

 

나무가 맑은 하늘을 우러러 살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잎과 잎들이 가슴을 열고

고운 햇살을 받아 안듯

 

나무가 비바람 속에서 크듯

우리도 그렇게

클 일이다.

대지에 깊숙이 내린 뿌리로

사나운 태풍 앞에 당당히 서듯

 

나무가 스스로 철을 분별할 줄을 알듯

우리도 그렇게

살 일이다.

꽃과 잎이 피고 질 때를

그 스스로 물러 설 때를 알 듯

 

 


 

 

오세영 시인 / 난(蘭)을 기르며

 

 

난(蘭)을 기르며

한 겨울 난다.

 

밖에는 여인(女人)의 원한(怨恨) 같은

서릿발이 치고

사는 것이 서럽다고 서럽다고

눈보라 에우는데,

병(病)든 지어미의 머리맡을

다소곳이 지키는 한 포기의

난(蘭),

난(蘭)은

겨울을 먹고 사는 꽃이다.

 

꽃을 꺾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은

난(蘭)을 기를 일이다.

 

여윈 암노루

사향(麝香) 찾아 떠나간 빈 골을

싸늘한 향기(香氣)로 피어나는

꽃.

 

난(蘭)을 기르며 보낸 한 철은

서러운 듯 서러운 듯

아름다워라.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날개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어느 때

새를 맞춘다.

 

타버린 의식체(意識體)가 되어 언덕 너머

떨어지는 낙과(落果).

번득이는 비늘로 휩싸이는 의문(疑問)들.

 

문을 밀치면 거기 놓인 십자가에

문득 와서 꽂히는 화살, 온 밤을 피가 흐르고

경험의 뜨락에 저버린 잎새들이

앙상한 그림자로 창가를 드리울 때,

 

한 마리 새가

문법의 가지를 차고 오른다.

난다. 파열하는 꽃잎 속을, 시간의

폭동 속을,

아아 뜨거운 수소이온. 그 부력(浮力),

 

날카로운 바람을 몰고, 한 소절(小節)의 아침을 건너

햇살이 파도치는 바다에서

인력을 끊고 솟아오른 한 개의 램프.

 

드디어 타버린 육체의 아픔 위에

부리로 대낮을 깨면

내가 쏘아 올린 화살은 어느 때

내 가슴에 와 꽂힌다. 아아

빛을 털고 일어서는 한 마리의 새.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라일락 그늘 아래서

 

 

맑은 날,

네 편지를 들면

아프도록 눈이 부시고

흐린 날,

네 편지를 들면

서럽도록 눈이 어둡다.

아무래도 보이질 않는구나.

네가 보낸 편지의 마지막

한 줄,

무슨 말을 썼을까.

 

오늘은

햇빛이 푸르른 날,

라일락 그늘에 앉아

네 편지를 읽는다.

흐린 시야엔 바람이 불고

꽃잎은 분분히 흩날리는데

무슨 말을 썼을까.

날리는 꽃잎에 가려

끝내

읽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줄.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19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1968년 同 대학 대학원서 석사학위(1971) 및 문학박사학위(1980) 받음. 1968년 《현대문학》에 <잠깨는 추상>이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 충남대학교 (1974~1981)와 단국대학교 (1981~1985)에서 국문학을,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현대문학(현대시)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 시집으로 『시간의 뗏목』,『봄은 전쟁처럼』, 『문열어라 하늘아』, 『바람의 그림자』 등과 시선집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등이 있음. 한국시학회장,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 녹원문학상 평론부문(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상 문학부문 대상(2000), 현대불교문학상(2009)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