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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측백나무 울타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8.

이하석 시인 / 측백나무 울타리

 

 

버스에 부딪혀

소형차는 길 밖으로 튕겨

가로수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뒤집혀져,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그러나, 다아,

살았다.

죽음의 냄새 같은

향기가 주위에 가득할 뿐.

그것은 살아 있는,

측백나무 향기.

 

살펴보니 측백나무 울타리를

들이받고 멈춘 것이었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우릴 막아주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측백나무 너머 캄캄한

죽음의 세계가 보인다.

 

신성한 향기로운 나무라고

모든 길들마다 측백나무를 심자고

그것이 죽음을 막아준다고,

측백나무를 찬양한다.

 

그러나 나는 결국 한쪽만을 찬양한 것이다.

측백나무가 어찌 죽음에 개의하랴.

측백나무 울타리 저 너머에서는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더러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달려나가지 못하게 타이른다,

이쪽 켠에

도리어 위험한 세계가 있다고.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하석 시인 / 컵 1

 

 

유리창 밑 쇠의자 위, 그 캄캄한

공간에 빈 컵이 놓여 있다.

컵에 비친 노을 속, 어슴프레한 붉은

얼굴이 하나 캄캄한 머리칼 늘어뜨린 채,

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차고 강한 철제의

의자 모서리에서 돋는 녹의 붉은 반점들은

어둠을 향해 녹아 내리고, 허물어져 가는

빈 집은 창만이 맑다.

 

컵에 묻어 있는 것. 사랑 같은 것 또는 혼곤히

남아 있는 진홍색 루즈는 흙빛깔이 되고 싶어한다.

그 순간 컵 속에서 맑은 수줍음 하나가 끓어 오르고

컵은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수줍음만 남아

이룩한 고요가 집마저 무너뜨린다.

그 다음 이 폐허의 구석에서 사랑처럼

풀과 흙냄새가 피어 오른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이하석 시인 / 타이프라이터 1

 

 

금융 회사의 김양은 손을 다쳤다, 타이프라이터 속에

서류를 끼워 넣다. 화장실에서 손을 붕대로 감은 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조그맣게

Q자는 열리고, 때로 붕대를 만질 때 마다

몇 마디 말이 변기 속으로 급히 빠져 나갔다.

클립에 끼워진 하루를 처리하는 손이

금융 회사의 현관 유리에 붉게 걸릴 때,

그녀의 머리칼은 흘러 내리고, 엉덩이는

타이프라이터처럼 삐걱거렸다.

그녀는 오늘 밤 남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손이 젖어서, 타이프라이터의 숫자를 잘못 찍어

해고되었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투명한 속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 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 다닐 때,

버려진 아무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속으로 열며.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기자)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전쟁 직후인 1953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명동 난민촌 언저리에서 자람.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 등단. 1978 영남일보 기자. 1980 대구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2005 영남일보 논설실 실장. 시집『투명한 속』(1980) · 『김씨의 옆 얼굴』(1984) · 『우리 낯선 사람들』(1989) · 『측백나무 울타리』(1992) · 『금요일엔 먼 데를 본다』(1996) 등을 냈다. 1990 제9회 김수영문학상. 1990 도천문학상. 1992 제4회 김달진문학상. 1996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