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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8.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1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 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山頂)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天上)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2

 

 

나는 말을 하러 왔지만 침묵만 지르고 말았다.

산정(山頂)이여,

내가 신록(新綠)의 눈으로 찾아냈던 너의 첫 글자여.

거기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움트면서

너의 언어에 깃들고자 하였다.

씨앗들이 부풀은 흙을 발바닥에 익히면서

너의 언어와 생리를

낯선 이국어처럼 흡수하고자 하였다.

허나 그것들이 무슨 소용에 닿았단 말인가

그것들은 이미 내 귀를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하나의 씨앗이 품고 있는 조그마한 기쁨과

거기 예비되어 있던 주검.

내가 영혼의 귀로 듣던

나무 뿌리들의 은밀한 대화,

그것들도 이제 바람소리처럼 내 귀를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말해보라, 내가 출발해서 도착한 지점을.

해와 달과 그릇 그리고 지상의 열매와 같이

태초부터 원형(原形)을 지향해 온 것들.

씨앗으로 출발한 한 알의 곡식조차

태초의 원형(原形)을 지향하지 않았는가.

태초의 원형(原形)으로 회귀하지 않았는가.

말해보라, 내가 도착해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 지점을.

폭포를 거슬러 타고 오르며

상류의 출생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알을 낳고 죽는

연어처럼

결국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로 다시 회귀하는 필생의 여정.

그렇다, 모든 도착점은 최초의 출발점.

어디가 빛으로 만개(滿開)하는 태허(太虛)공간(空間)인가.

저 아래 굽어보이는 도시여, 늙어버린 피부여.

삭발해 버린 땅

삭발해 버린 바위산의 공적(空寂), 그 속에다 너의 언어를 해산(解産)하라.

내가 가진

이 만성 기력상실의 수문장의 팔뚝과

의지박약의 창(槍)을 버리게 하라.

명령하라.

칠십먹은 주름살의 언어를 나의 언어에서 버리게 하라.

나와 나의 언어들을

자석처럼 몸을 붙이게 하라.

 

허나 지금은 쇳덩어리 같은 사방의 어둠.

밀려오는 쇳덩어리 같은 어둠.

압살(壓殺)되는 쇳덩어리와 쇳덩어리의 침묵.

한밤내 무력한 출혈.

누가 이 한밤중 쇳덩어리 속에 피와 신경을 통해놓을 것인가.

누가 이 한밤중 쇳속에 깃든 천근 침묵을 깨우며 응전(應戰)하겠는가.

누가 이 한밤중 땅속 깊은 광석(鑛石)의 혈관을 터뜨려

우리들의 어둠 속에다 낭자히 수혈해 놓겠는가.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趙鼎權, 1949년~2017년)

194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19690년 《현대시학》 창간호(3월호)에 박목월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허심송』, 『하늘이불』,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창과 석좌대우교수. 2017년 11월 8일,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