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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 / 버스를 기다리며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 나온다 100원을 뒤집으니 세종대왕 나오고 50원 뒤집으니 벼이삭이 나온다 퇴근길 버스 정거장에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선 여자 궁둥이도 훔쳐보며 동전밖에 없어 갈 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선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나으리들은 배포가 커서 끄떡도 않는데 신문에 나온 여공의 죽음을 보고 동전밖에 없는 제 자신도 잊은 채 울먹이는 못난 나는 얼마나 작으냐 말 한마디 큰 소리로 못하고 땡볕에 서서 동전이나 뒤집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보탑 뒤집으니 10원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먼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이든 한번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일없이 일없이 동전을 뒤집는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정희성 시인 / 불망기(不忘記)
내 조국은 식민지 일찌기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어쩌다 아비가 물려준 남루와 목숨뿐 나의 잠은 불편하다 나는 안다 우리들 잠 속의 포르말린 냄새를 잠들 수 없는 내 친구들의 죽음을 죽음 속의 꿈을 그런데 꿈에는 압핀이 꽂혀 있다
그렇다, 조국은 우리에게 노예를 가르쳤다 꿈의 노예를, 나는 안다 이 엄청난 신화를 뼈가 배반한 살, 살이 배반한 뼈를 뼈와 살 사이 이질적인 꿈 꿈의 전쟁, 그런데 우리는 갇혀 있다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 포르말린 냄새나는 꿈속 깊이
사월에, 내 친구는 사살당했다 나는 기억한다 국민학교 시절 그가 책 읽던 소리, 그 죽은 지 십여년 책을 펴면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면 죽어서 자유로운 그의 목소리 그런데 여기엔 얼굴이 없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그런데 소리만 들린다 오 하느님, 하는 소리만 생각난다 어젯밤 붙잡혀간 시인의 넋두리, 그는 부정한다고 했다 세번도 더, 조국의 관형사여 제 이름에 붙은 관형사 시인의 관이 무겁다고 머리를 떨구고 이제는 아름다운 말도 가락도 다 잊었다던 그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 무섭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땅이 무섭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땅에서 사는 내가 무섭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오, 기억하게 하라 우리들의 이름으로 불러보는 자유, 나의 조국아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사월(四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굳이 돌에 새긴 피 그 시절의 무덤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석탑(石塔)뿐 이 땅의 정처없는 넋이 다만 풀 가운데 누워 풀로서 자라게 한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 봄이 오면 속절없이 찾는 자 하나를 젖은 눈물에 다시 젖게 하려느냐 사월(四月)이여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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