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혜영 시인 / 파라다이스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6.

김혜영 시인 / 파라다이스

 

 

  축제가 시작되었다.

  삐거덕거리는 강의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햄릿의 집(Hamlet House)으로 달려갔다.

  햄릿을 읊조리던 청춘들이 막걸리를 마셨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유령처럼 미리내 골짜기에 흘러 다녔다.

  회색빛 우울이 번지던 1980년대

  오필리어처럼 자살을 꿈꾸기도 했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예순 살이 된 소녀와 소년들

  워즈워드, 바이런, 셀리, 키츠가 지은 책의 숲에서

  블록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끝이 없는 길에서

  만난 우리들은 서로 꼬옥 안아주었다.

 

  리어왕 복장을 한 교수님이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외설스러운 말장난을 흉내 내었다.

  구멍을 파는 자여, 무덤을 파는 자여  

 

  촘스키의 통사론을 열강하시는 교수님의 입술에서

  하얀 꽃이 튀어나왔다. 어깨에 묻은 분필 가루

  그는 나뭇가지를 칠판에 그렸다. 학생들은 노트에

  그린 나뭇가지를 연애편지에 그려 넣었다.

 

  폭풍의 언덕으로 질주하던 소녀와 소년들의 머리에

  희끗희끗 풀잎이 돋아났다. 환하게 열린 봄 바다였다.

 

  고도를 기다리는 과거와 미래의 청춘들

  효원 광장에 앉아 베게트와 버지니아 울프와 실비아 플래스가

  만든 블록으로 푸른 숲을 만든다. 긴 복도와 콰이강의 다리와

  미리내 계곡 너머 별이 춤추는 파라다이스

 

웹진 『시인광장』 2009년 여름호 발표

 

 


 

김혜영 시인

경상남도 고성에서 출생. 부산대 영어영문학과 및 同 대학원을 졸업. 1997년 《현대시》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천년의시작, 2004),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지혜, 2011)과 평론집 『메두사와 거울』이 있음. 현재 계간 『시와 사상』 편집위원이며 신라대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