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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가시나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4.

천양희 시인 / 가시나무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勞役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일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천양희 시인 / 견디다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 번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천양희 시인 / 교감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사랑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환멸은 길고 매혹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요.

 

희망 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희망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현실은 길고 환상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했었지요.

 

 


 

 

천양희 시인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천양희 시인 / 그 여자의 극(極)

 

 

늙지 않는 희망이

추근대는 추억이

썩지 않는 사랑이

겨우 그 여자를 옹호한다 옹색한 옹호

 

늙을 줄 모르는 아픔이

한정없는 한숨이

썩을 줄 모르는 슬픔이

겨우 그 여자를 변호한다 궁색한 변호

 

희망이 추억이 사랑이

그 여자의 환상의 極이다

아픔이 한숨이 슬픔이

그 여자의 환(括)극(極)이다

 

 


 

 

천양희 시인 / 그 여자의 극(極)그것

 

 

그것은 쓰고 싶은 연장

그것은 무엇이든 덥석 잡는다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다

그것은 잡을 때 힘이 세고 놓을 때 힘이 없다

 

그것은 굴리고 싶은 바퀴

그것은 무엇이든 밟고 지나간다

한번 밟으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밟을 때 힘이 세고 지나갈 때 힘이 없다

 

한 시절을 주무르고 누르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다 나는 보았다

 

그들의 손과 발은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 한통속인가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 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했다. 1996년 소월시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11년 제26회 만해문학상, 2014년 제9회 불교문예작품상, 2017년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