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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가시나무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勞役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일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천양희 시인 / 견디다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년에 단 한 번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천양희 시인 / 교감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사랑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환멸은 길고 매혹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요.
희망 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희망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현실은 길고 환상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했었지요.
천양희 시인 /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천양희 시인 / 그 여자의 극(極)
늙지 않는 희망이 추근대는 추억이 썩지 않는 사랑이 겨우 그 여자를 옹호한다 옹색한 옹호
늙을 줄 모르는 아픔이 한정없는 한숨이 썩을 줄 모르는 슬픔이 겨우 그 여자를 변호한다 궁색한 변호
희망이 추억이 사랑이 그 여자의 환상의 極이다 아픔이 한숨이 슬픔이 그 여자의 환(括)극(極)이다
천양희 시인 / 그 여자의 극(極)그것
그것은 쓰고 싶은 연장 그것은 무엇이든 덥석 잡는다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다 그것은 잡을 때 힘이 세고 놓을 때 힘이 없다
그것은 굴리고 싶은 바퀴 그것은 무엇이든 밟고 지나간다 한번 밟으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밟을 때 힘이 세고 지나갈 때 힘이 없다
한 시절을 주무르고 누르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다 나는 보았다
그들의 손과 발은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 한통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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