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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비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천양희 시인 / 사람의 일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천양희 시인 / 삶에게 길을 묻다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천양희 시인 /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생각(生覺)한다는 건 생(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생(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생(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천양희 시인 / 서른살의 눈
허공에서 소리치며 눈이 내려온다 가로수들이 그걸 받으려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미 썩은 잎들은 따뜻해 추억의 길들 오래 적막하다 서른이 되면 길모퉁이 어디서나 가로등이 반짝, 켜지리라 믿었다 나는 이제 다른 길 예감할 수 없다 길바닥 하나 덮겠다고 눈발은 종일 몸 바꿔 뒤척인다 그러나 눈송이들이여 백색 정토! 설국(雪國)이나 설궁(雪宮) 그건 늘 우리의 함정이었다 한번 내린 눈은 때가 되면 세상이 곧 물든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의 길 사이로 눈발이 빠져나간다 눈발이 눈의 발이 하늘로 들려 있다 눈은 녹고 그래서 눈에 눈물이 고인다.
천양희 시인 / 세상 읽기
세상을 뜻대로 읽고 싶어 가출을 출가로 불성을 성불로 유수를 수유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거꾸로 읽고 싶어 정부를 부정으로 선생을 생선으로 교육을 육교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마음대로 읽고 싶어 가능을 능가로 입산금지를 지금 산에 들어감으로 바꿔 읽어보다가
세상을 세상대로 읽고 싶어 不二를 이불로 불행을 行不로 유일을 일류로 착각하다가
삶은 삶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나는 나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각자를 자각으로 쓰고 말았네 실상을 상실로 쓰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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