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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마침표
찍는 것이지요. 그리는 게 아니구요. 질질 끄는 게 아니어요.
황인숙 시인 / 막다른 골목
문은 헤맨다 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토록 완강하게 그는 문을 흔들고 있다 문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는 부술 듯이 문을 두드린다 문은 흔들리면서 마음을 굳혔다 난 몰라, 널 모른다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는 헤맨다 여태껏도 헤매다가 우연히 이 문을 만났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흔들면서 자기가 왜 이러는지 헤맨다 문의 완강한 거부만이 그의 완강함의 명분이다 깊은 새벽 막다른 골목길을 그와 문이 흔들고 있다.
황인숙 시인 / 모든 꿈은 성적이다
나는 터덜터덜 잡초가 함부로 자란 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엔 암소 구름이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목이 좀 마른 듯했다. 그 아름 고목 밑둥은 이 빠진 항아리처럼 덤불 속에 던져져 있었다. 무엇이 움직이는 듯해서 나는 다가갔다. 고목 밑둥에서 잔가지가 자라났다. 갈색 사슴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사슴의 한쪽 눈은 나무 옹이로 되어 있었다. 반은 나무인 사슴이 비비적거리며 나무 구멍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드러나자 나는 그것이 올빼미인 것을 알아챘다. 푸드덕거리며 올빼미는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사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무 옹이 눈을 가진 사슴은 나를 한번 힐끗 돌아보고 절뚝거리듯이 날아, 뛰어 달아났다. 사방이 찌르듯 조용했다. 내 얘기를 들으신 프로이트 선생님께서는 자신만만하게 풀이하신다. "모든 꿈은 성적인 것이야" 단성사 근처 핫 댄스 곡이 꽝꽝 울리는 복작복작한 커피점에서.
황인숙 시인 /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이렇게 피곤한데 깊은 밤이어서 집 앞 골목이어서 무뚝뚝이 걸어도 되는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을 것같이 피곤하다고 피곤하다고 걸음, 걸음, 중얼거리다 등줄기를 한껏 펴고 다리를 쭉 뻗었다 이렇게 피곤한 채 죽으면 영원히 피곤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문득 두려워서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죽을 것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生은, 명료해지는 대신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황인숙 시인 / 문밖에서
방을 구하지 못한 혹은 깃들일 마음을 구하지 못한 가령 사랑들이 서리가 되어 깨어난다.
골목골목에 대로의 한적한 곳에 우두커니 나무 밑에 달빛 아래 서리들이 웅숭거린다.
창밖에. 모든 문밖에.
황인숙 시인 / 바람 부는 날이면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황인숙 시인 / 밤
밤은 네가 잠들기를 바란다 자장 자장 자장 밤은 차곡차곡 조용해진다
밤은 너를 잠재우길 바란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자장
밤은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 자명한 산책/문학과 산책/2003
황인숙 시인 / 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너는 종종 네 청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네가 켜켜이 응축된 시간이라는 것을 네 초상들이 꽉꽉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져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나온 풍경들을 터지도록 단단히 쟁여 지니고 날아다니는 바람이 너라는 것을
그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희고 곧고 깨끗한 아, 청량한 너의 청년!
그 모습은 내 동공 안쪽 뇌리에 각인돼 있고 내 아직 붉은 심장에 부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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