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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혜영 시인 / 검지에 핀 꽃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0.

조혜영 시인 / 검지에 핀 꽃

 

 

감자 썰다 검지에서 피 뚝 떨어진다

아리다

 

한 시절 아리게 산 적 있었지

하얀 광목천에

검지를 갈라 노동해방을 쓰고

한번은 검지를 깊게 베어

원직복직을 외치며 혈서를 썼는데.

 

지금 그 검지에서

붉은 피 뚝뚝 떨어진다

하염없이 피가 흐르고

도마를 타고 싱크대로 흘러가는데

옹이 박힌 손끝에서 꽃망울 터진다

 

나는 지금 무어라고 쓰고 싶다

한번 꽃처럼 피어

가슴 깊은 상처를 다시 남기고 싶다

 

 


 

 

조혜영 시인 / 언덕 위의 그 방

 

 

언덕위에 그 방 사글셋방

정거장 가는 길은 가파르다

송림4동 철탑 밑의 작은 내 방

동화책 만한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침침한 형광등 불빛

마른 장작 같은 나무대문

15년 만에 찾아와

나를 만난다

야근하고 돌아와 라면 끓이던

번개탄으로 붙 붙이면 새벽녘에야

언몸 달래주던 그 방

숨죽여 노동법과 역사를 토론하던 방

선배의 눈빛에 마음 주다

반성문 쓰며 울었던 방

노조를 만들던 날

동료들과 부둥켜안은 방

스무살 더듬이가 유난히 빛을 내며

숨고르기 벅찼던 그곳

구멍가게 막걸리 좌판도

철물집 할아버지도 모두 여전한데

사글셋방 남겨놓고

나만 멀리 떠났구나

 

 


 

조혜영 시인

1965년 충남 태안 출생. 2001년 제9회 전태일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 수상. 시집『검지에 핀 꽃』『봄에 덧 나다』(푸른사상사. 2012)가 있음. 노동자 시인으로 <검지에 핀 꽃>은  2005년 ‘힘내라 한국문학’ 2/4분기 이 달의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됨. 인천노동자문학회, 전국노동자문학연대 활동. 현재 인천작가회의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