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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시인 / 어떤 하루
건설중인 빌딩 꼭대기에 둥지를 튼 송골매 두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몇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더니 우리는 언제 저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궁금해지더니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랐느니 아파트 공사장에 까치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멜버른이 아닌 우리나라 서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느니 이것이 사랑하며 얻는 길이거니 득도의 길이거니 아름다움과 자비는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는 것
나, 오늘 무우전(無憂殿)에 들고 말았네.
천양희 시인 / 어제를 돌아보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혼자 울어본 적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 있는가 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얼굴을 묻어본 적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인생은 추억을 통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천양희 시인 / 오래된 농담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 농사 풍성하던 그 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천양희 시인 / 왜요?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별자리, 오늘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총총
천양희 시인 / 외길
가마우지새는 벼랑에서만 살고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삽니다.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무소새는 둥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고소공포증도 폐쇄공포증도 없습니다. 공중이 저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놓아두시지요. 외길이 나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시지요.
천양희 시인 / 외딴 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 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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