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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진성 시인 / 앙코르와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1.

황진성 시인 / 앙코르와트

 

 

  종종 왕도 한 번씩은 신을 만나고 싶었다

  거추장스런 위엄과 모든 짐 내려놓고 신과 합일한 후

  가난한 마음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간 깊이 닫아 두었던 교만의 우물

  때론 왕이라도 손댈 수 없는 일 아무도 모르게 고하고

  신과 함께 하늘을 날고 싶었다

  어깨동무하고 세상 굽어보며 천상주 한 잔을 마시면

  꿈틀대며 발버둥치는 욕계의 백성도 긍휼하리라

 

  오로지 제국의 왕만이 내딛던 천상의 계단

  21세기 서민이 네 발로 기어오르고 있다

  그 높은 탑에 황금태양이 걸려 있을 것 같은데

  노오란 햇살이 얼굴을 비비는 텅 빈 제단

  시들어가는 풀잎 몇 포기 촛대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천상의 여신도 왕과 밀월여행을 떠나버렸다

  멀리 색계가 보이는 신의 문간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카메라 받아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 주더니

  1달러 구걸하는 까만 자야바르만*의 후손

  문득 미군병사에게 ‘기브 미 초콜릿’을 연발하던

  50년대 전후 조국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신과 독대하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

  마치 비워진 마음이 바람의 수수깡 같아

  왕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떨며 기어 내려왔을까

 

  인간이 가장 힘겹다는 경사 70° 계단

  속죄하듯 매일 오르내린 왕은 위대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천년의 계단 위에서 자야바르만을 만나리라

  제 안에 비로소 무색계의 풀잎 한 장을 담자

  그제야 신과 함께 훨훨 날아

  현기증에 떨며 뒤로 엎드려 네 발로 기어 내려온다

 

* 앙코르 왕국을 연 크메르족의 왕

 

웹진 『시인광장』 2010년 7월호 발표

 

 


 

황진성 시인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수학과 졸업. 2005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폼페이 여자』(한국문연, 200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