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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인숙 시인 / 비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2.

황인숙 시인 / 비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가슴 졸일 자식도 없는

, 같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할머니 비에 젖으신다

 

후암동 종점

햄버거집 처마 밑

깊숙이도 못 들어서시고

처마 끝에 쪼그려앉아

할머니 비에 젖으신다

 

흐린 유리알 같은 할머니의 눈에

빗물이 흐른다, 멈추지 않는다

빗줄기는 머리에도 아니고 가슴에도 아니고

할머니의 몸에 들이친다

납작 눌린 머리칼과 곱은 손등에 들이친다

 

할머니는 기억도 기력도 없으시지

도둑고양이만큼도 아는 이가 없으시지

아이고, 하느님

왜 나를 이때까지 살게 하셔서

이렇게 춥고 외롭게 하십니까?

한탄도 할 줄 모르시지

하지만 평생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설움은 남으셨을 할머니

생각도 없이 눈물이 흐르고

그러면 멈추지 않으실 할머니

 

비가 조금 듬성해지자

할머니는 접은 판지상자 뭉치를 머리에 이시고

비틀비틀 일어나신다

빗물에 젖어드는

판지 뭉치 머리에 이시고

할머니,

멍한 얼굴, 비틀걸음으로

어디로, 어디론가 걸어가신다.

 

- 자명한 산책/문학과 산책/2003

 

 


 

 

황인숙 시인 / 비 온 가을 아침

 

 

블록 담벼락은 젖어 있었다.

남은 잎새를 마저 던지고

튤립나무는 우두커니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길바닥은 노란 잎들을

힘껏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남자는 튤립나무보다

더 벗고 있었다.

주름살을 기묘히 구겨

갓난애의 얼굴을 하고

후들후들 떨며

행인들의 눈치를 보며

먼 유년을

놀고 있었다.

 

 


 

 

황인숙 시인 / 비유에 바침

 

 

나는 아직 무사히 쓸쓸하고

내 쓸쓸함도 무사하다네.

 

하루가 얼마나 짤막한지

알지 못했다면

단 하룬들

참지 못했으리.

 

배를 타려 하네.

섬.

깊은 독서 끝에

처박혀지는.

 

나는 아직 무사히 쓸쓸하고.

왜냐하면 그저 그거인 나날,

그러나 비유는 다채롭기에.

 

 


 

 

황인숙 시인 / 사닥다리

 

 

봄이 되면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닥다리를 세우겠네

은빛 사닥다리,

은빛 사닥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오르겠네

사닥다리, 뼈로만 이루어진 사닥다리

한 디딤마다 내 발은 후들후들 떨겠네

내 손은 악착같이 사닥다리를 쥐겠네

사닥다리, 발이 손을 따르는 사닥다리

 

구름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대추나무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종달새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돌멩이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땅바닥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내 사랑이 아슬아슬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오네

 

봄이 되면 땅바닥은 누워 있는 사닥다리를 세우네

 

 


 

 

황인숙 시인 / 사랑의 구개

 

 

기억 없이도 그리움은 찾아오고

기억 없이도 목이 마르다.

풀들은 흙 묻은 얼굴을 털고

뭐라고 뭐라고 나무들은

햇볕 속에 잎을 토해내는데,

다시 봄이란다.

 

(그대여, 그토록 멀리 있으니

그 거리만큼의 바람으로

뺨을 식히며 토로하노라)

 

참 오랜만에 볼펜을 쥐고 눈을 감았다.

그만해도 피가 따뜻했다, 처음엔.

나의 척추, 나의 묵주, 나의,

 

나는 그 뾰족한 끝으로

차라리 심장을 후벼파고

뻗어버리고 싶었다,

햇볕 속에.

 

아, 다시 봄이라는데

갈라진 마음은 언청이라서

휘파람을 불 수 없다.

 

 


 

 

황인숙 시인 / 산오름

 

 

친구와 북한산 자락을 오른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빨리 걷고

친구는 느릿느릿,

그의 기척이 이내 아득하다

나는 친구에게 돌아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기를 몇 번, 기어이 친구가 화를 낸다

산엘 왔으면, 나무도 보고 돌도 보고

풀도 보고 구름도 보면서 걷는 법이지

걸어치우려 드느냐고

아하!

친구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걸으려는데

어느 새 획획 산을 오르게 되는 나다

땀을 뚝뚝 흘리며 바위에 앉아 내려다보면

멀리서 친구가 느릿느릿 올라온다

나무도 데리고 돌도 데리고

풀도 데리고 구름도 데리고.

 

 


 

 

황인숙 시인 / 삶

 

왜 사는가?

왜 사는가……

외상값  

 

 


 

 

황인숙 시인 / 삶의 시간을 길게하는 슬픔

 

 

나이는 서른 다섯 살.

가을도 저물어 시린 바람이 안팎으로 몰아친다.

이제는 더 이상 청춘도 없다. 사랑도.

 

밤은 막막, 낮은 휑휑.

그렇지만,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앙다문 이빨.

눈꺼풀 저 구석에 지그시 눌러둔

쓰라린 눈알.

억울해? 억울하지.

 

억울함을 딛고 비참을 딛고

생이 몰아치는 공포를 딛고

딛고, 딛고!

 

오, 추락하는 꿈으로도

오, 따분한 꿈으로도

오, 처량한 꿈으로도

비비틀리는, 푸드덕거리는

몸은 작열한다!

 

죽은 몸에는

눈먼 꿈도 깃들이지 않는다네.

당신을 저버린 연인이 무섭게 차갑다고?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황인숙(1958년 ~ ) 시인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2004년 제23회 김수영문학상.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