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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우두커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3.

천양희 시인 / 우두커니

 

 

희망이 필요하다고 얻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묶는다고 튼튼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깍는다고 깍이는 건 아니었습니다.

마음 한줌 쥐었다 놓는 날이면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었습니다.

 

 


 

 

천양희 시인 /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

 

 

열매를 보면서 꽃을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어둠을 생각합니다.

꽃은 열매를 위해 피었다 지고

어둠은 빛을 위해 어둡습니다.

별을 보면서 하늘을 생각하고

나무를 보면서 산을 생각합니다.

하늘은 별을 위해 별자리를 만들고

산은 나무를 위해 숲을 만듭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천양희 시인 / 운명이라는 것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운명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천양희 시인 / 이른봄의 시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을 안개를 길어 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 웃고 있다.

 

 


 

 

천양희 시인 / 자화상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 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천양희 시인 /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 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천양희 시인 / 직업

 

내 생의 업 중에 큰 업이

시업(詩業)이지 하다가도

시가 밥 먹여주냐,고

시답잖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밥도 안 되는 그걸로도

업이 될까 싶다가도

누가 나더러

그 시 참 좋데요, 할 때마다

나 혼자 감동 먹어

시로써 배부른 나에게는

말도 안 되지 싶다가도

또 누가 나더러

시만 써서 어떻게 사냐고 할 때마다

이태백 같은 사람은

술만 마시고도 시선(詩仙)이 되었는데 싶다가도

평생 시로써 업을 삼더라도

시선은커녕 시인도 못 되지 싶다가도

그런데 왜 하필

시업이 내 생업일까 싶다가도

생업이 실업이 안 되었으면 하다가도.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 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했다. 1996년 소월시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11년 제26회 만해문학상, 2014년 제9회 불교문예작품상, 2017년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