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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삶의 음보
노래방에서 누군가 아주 느린 곡조의 가요를 노래하면 따라 듣기에만도 나는 진땀이 난다 내게는 그가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불러낸다고 느껴진다 저 힘! 가창력이라기보다 저 정신력! 말하자면, 저력! 다시 말하자면 가창력! 장식음과 바이브레이션 모음의 젖과 꿀이 넘쳐흐르네
나는 간신히 음표에 올라앉았다 음과 음 사이의 거리가 내게는 항시 아득하여 나는 총총히 노래했다 짤딸막한 모음의 나의 노래여 내 노래는 언제나 단조로웠다.
황인숙 시인 / 생활!
결혼한 친구가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일해서 벌어먹고 사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수삼년이 걸렸다... 나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처음엔 미칠 듯 외로운 일이었다."
자기 먹이를 자기가 구해야만 한다는 것. 이 각성은, 정말이지 외로운 것이다.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더욱이나.)
내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가난하다는 건 고독한 것이다.
인생이란! 고단하지 않으면 구차한 것.
황인숙 시인 / 세상의 모든 비탈*
걷는 게 고역일 때 길이란 해치워야 할 '거리'일 뿐이다 사는 게 노역일 때 삶이 해치워야 할 '시간'일 뿐이듯
하필이면 비탈 동네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 오늘 밤도 묵묵히 납작한 바퀴 위에 둥드러시 높다랗게 비탈을 싣고 나른다 비에 젖으면 몇 곱 더 무거워지는 그 비탈 가파른 비탈 아래 납작한 할머니들.
* KBS 문화스페셜 '세상의 모든 라면박스'에서 차용.
황인숙 시인 / 세상의 모든 아침
세상의 모든 눈송이들이 지금 춤추듯 내리고 있다 어딘가 세상의 모든 눈 내리는 곳에
그래, 나의 애인은 사랑을 다짐하고 있다 누군가 세상의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세상의 모든 눈송이들이 바람을 수놓는다 세상의 모든 눈보라치는 곳에
나의 애인의 사랑은 그침이 없지 세상의 모든 그가 사랑하는 여자들!
아, 세상의 모든 눈을 다 맞을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살 수는 없다
지금 어디선가...
황인숙 시인 / 수전증
가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이 떨릴 때가 있다 사람들 앞에서 제멋대로 손은 떨고 나는 확확 달아오르지 못하게 얼굴을 굳힌다 그리고 내 손이 생쥐나 재떨이나 구름인 양 내려다본다 한 번 떨기 시작하면 제어할 수 없는 손
얼굴도 아니고 어깨도 아니고 가슴도 아니고 손이 어리숙하게 보여준다 피로나 두려움 때로는 긴장과 흥분
달아나고 싶은거다 그래서 앞발이 파들거리는 것이다
황인숙 시인 /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황인숙 시인 / 시장에서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들러보았죠. 수줍은 제비꽃에 벗은 완두콩. 그에게는 아무짝에 소용없는 것. 그럼그럼 딸길 살까 바나날 살까? 아니면 익살맞은 쥐덫을 살까? 그를 위해 무얼 살까 둘러보았죠. 한 쾌의 말린 뱀, 목에 늘인 할아범. 아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뽀골뽀골 미꾸라지 시든 오렌지 아니면 특제 실크덤핑넥타이. 아아아 재밌어 이걸 사줄까?
복작복작 밀리며 걷는 내 손엔 한 쪽엔 아이스크림 한 쪽엔 풍선. 농담처럼 절뚝절뚝 뛰는 지게꾼. 그 뒤를 바싹 쫓아 빠져나왔죠. 주머니에 뭐가 있나 맞춰보아요. 바로바로 올림픽 복권이어요. 만약에 첫째로 뽑힌다면은 아아아아 재밌어 너무 재밌어 풍선처럼 그이는 푸우 웃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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