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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 / 11월의 나무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황지우 시인 /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에서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공원 뒤편 순대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시인 /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 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황지우 시인 / 겨울 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황지우 시인 /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령은 초소다
한려수도,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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