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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11월의 나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3.

황지우 시인 / 11월의 나무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황지우 시인 / 거룩한 식사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에서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공원 뒤편 순대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시인 /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나, 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황지우 시인 / 겨울 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황지우 시인 /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령은 초소다

 

한려수도,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