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홍수희 시인 / 2월 편지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3.

홍수희 시인 / 2월 편지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2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1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홍수희 시인 / 2월에 쓴 시

 

 

지금쯤 어딘가엔 눈이 내리고

지금쯤 어딘가엔 동백꽃 피고

지금쯤 어딘가엔 매화가 피어

 

지금쯤 어딘가에 슬픈 사람은

햇살이 적당히 데워질 때를 기다려

눈물 한 점 외로운 벤치 위에 남겨두고서

 

다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겠다

다시 어디론가 길을 뜨고 있겠다

 

 


 

 

홍수희 시인 / 4월

 

 

화선지 위에 어둠을 그린다

그만 문(門)은 닫히고 만다

아무리 많은 색깔을 늘어놓아도

그릴 수 없는 내 속의 캄캄한 어둠

어둠은 또다른 어둠을 부르고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느닷없는 돌개바람의 미친 자기 분신,

당신은 나에게는 지나친 백야(白夜)!

부활의 4월은 내게 부활을 주지 않고

내 영혼의 무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단단하고 거대한 바윗덩이는

끝끝내 움직여 흔들릴 줄 모른다

어찌하여 바위는 구르지 않는가

시지프가 굴리고 굴리던 바위, 어찌하여

4월의 부활은 내 영혼의 부활을

흔들어 깨울 줄을 모르는가

마침내는 나만이 홀로이 책임져야 할

나의 원죄(原罪)를 묵상하는 밤,

나의 어둠은 비로소 시작된다

피투성이 부활은 어렴풋 기지개 켠다.

 

 


 

 

홍수희 시인 / 9월

 

 

소국(小菊)을 안고 집으로 오네

꽃잎마다 숨어 있는 가을,

샛노란 그 입술에 얼굴 묻으면

담쟁이덩굴 옆에 서 계시던 하느님

그분의 옷자락도 보일 듯 하네

 

 


 

 

홍수희 시인 / 11월의 시

 

 

텅텅 비워

윙윙 우리라

다시는

빈 하늘만

가슴에

채워 넣으리

 

 


 

홍수희 시인

1995년 문예지 <한국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이육사문학상 본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본상을 수상. 부산가톨릭 문인협회, 부산 문인협회, 부산 시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시집으로 [달력 속의 노을](1997,  도서출판 빛남)과 [아직 슬픈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2003, 도서출판 띠앗), [이 그리움을 그대에게 보낸다](2007, 도서출판 한솜), [생일을 맞은 그대에게](2019, 도서출판 해드림)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