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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인 / 5월이 오거든
날선 비수 한 자루 가슴에 품어라 미처 날숨 못 토하는 산것 있거든 명줄 틔워 일어나 하늘 밝히게 무딘 칼이라도 하나 가슴에 품어라.
홍해리 시인 / 가벼운 바람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 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 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 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생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홍해리 시인 /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홍해리 시인 / 가을 엽서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달빛을 맞은 지상의 벌레들도 밤을 도와 은실을 잣고 있습니다
별빛도 올올이 내려 풀잎에 눈을 씻고 이슬 속으로 들어갑니다
더 큰 빛을 만나기 위해 잠시, 고요 속에 몸을 뉩니다
오늘도 묵언 수행 중이오니 답신 주지 마십시오.
- 시집『푸른 느낌표!』(2006)
홍해리 시인 / 개운(開雲)
매화가 피었어도 눈으로도 귀로도 향기를 맡을 수 없더니 병원에서 돌아오자 꽃은 이미 다 지고 꽃이 있던 자리 쥐눈이 콩만한 열매 가녀린 탯줄에 매달린 아기처럼 조롱조롱 맺혀 있다 초록빛 앙증맞은 눈빛을 찾아 내가 건너뛴 시간의 간극(間隙).
개운하다, 풋사랑!
홍해리 시인 / 겨울 놀 지다
누가 망치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바닷속으로 하릴없이 박히는 거대한 황금 기둥 거꾸로 보면 거대한 둥근 불꽃을 누가 바닷속에서 떠받들고 있었다 쩌릿쩌릿 옆구리에 경련이 왔다 황홀이었다 절정이었다 막장은 얼마나 먼가 우주 인력으로 끓어오르는 막무가내의 바다 입술이 푸르게 젖어 밤새도록 깊은 꿈을 꾸고 있었다.
홍해리 시인 / 겨울바다에 가서
세월이 무더기로 지는 겨울바다 아득한 물머리에 서서
쑥대머리 하나 사흘 밤 사흘 낮을 이승의 바다 건너만 보네
가마득하기야 어디 바다뿐일까만
울고 웃는 울음으로 빨갛게 타는 그리운 마음만 부시고
파도는 바다의 속살을 닦으며 백년이고 천년이고 들고나는데---
까마아득하기야 어찌 사랑뿐일까 보냐.
홍해리 시인 / 귀북은 줄창 우네
세상의 가장 큰 북 내 몸속에 있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귀북이네
한밤이나 새벽녘 북이 절로 울 때면 나는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
봄이면 꽃이 와서 북을 깨우고 불같은 빗소리가 북채가 되어 난타공연을 하는 여름날 내 몸은 가뭇없는 황홀궁전 둥근 바람소리가 파문을 기르며 굴러가는 가을이 가면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네
너무 작거나 큰 채는 북을 울리지 못해 북은 침묵의 늪에 달로 떠오르네
늘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고 있네
-시집『황금감옥』(2008)
홍해리 시인 / 그녀가 보고 싶다
크고 동그란 쌍거풀의 눈 살짝 가선이 지는 눈가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빛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도톰하니 붉은 입술과 잘 익은 볼 단단하고 새하얀 치아 칠흑의 긴 머리결과 두 귀 작은 턱과 가는 허리 탄력 있는 원추형 유방 연한 적색의 유두 긴 목선과 날씬한 다리 언듯 드러나는 이쁜 배꼽 밝은 빛 감도는 튼실한 엉덩이 주렁주렁 보석 장신구 없으면 어때, 홍분 백분 바르지 않은 민낯으로 나풀나풀 가벼운 걸음거리 깊은 속내 보이지 않는 또깡또깡 단단한 뼈대 건강한 오장육부와 맑은 피부 한번 보면 또 한번 보고 싶은 하박하박하든 차란차란하든 품안에 포옥 안기는 한 편의 시 詩.
("홍해리 시집" '봄, 벼락치다'가운데 42쪽)
홍해리 시인 / 그늘과 아래
그늘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늘이 그늘그늘 드리워진 곳은 어디인가 그늘은 늘 아래 존재한다 그늘은 미끄러워 잡히지 않는다 그런 걸 알면서도 나는 '그늘 아래'라고 겁없이 쓴다 그늘에 아래가 있는가 그러면 그늘의 위는 어디인가 그래 어쩌자고 나는 그늘 아래로 파고 드는가 그냥 그늘 속으로 기어들지 않는 것인가 그늘은 무두질 잘 해 놓은 투명한 가죽이다 그늘에서 가죽에 막걸리를 먹여야 좋은 소리가 난다 그늘의 소리가 배어 있다 나온다 그늘북은 항상 얻어맞는 잔잔한 슬픔이다 그게 아니다 북은 젖어 있는 팽팽한 희망이다 그래 나는 늘 그늘이고 싶고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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