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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벌새가 사는 법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6. 16.

천양희 시인 / 벌새가 사는 법

 

 

벌새는 1초에 90번이다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번이나

내 몸을 쳐 시를 쓰나

 

시집 <너무 많은 입> 2005년 창비

 

 


 

 

천양희 시인 / 흐린 날

 

 

생각이 먼저 기슭에 닿는다. 강 한쪽이 어깨를 들어올린다. 下端이 저 아랜가. 문득 갈대숲에서 물떼새들이 달려나온다. 여름이 가는군. 나보다 먼저 바다로 든 길이 중얼거린다. 언제 내가길 하나 가졌던가. 물줄기를 한참 당기면 마음에 들어와 걸리는 수평선. 세상이 평등하기를 저것이 말해준다. 이런 날은 물가에 오래 앉을 수 있겠다. 물에도 길이 있다고 하였으나 물방개, 소금쟁이, 물잠자리들, 물이 좋아 물 먹고 산다는 것일까. 나는 꿈속에서도 어안이 벙벙한 물고기들을 보았다. 물의 세계란 그런것일까. 물까지도 한 잔의 물 속에선 흐르지 않는다. 나는 또 자주 쓴풀 몇 포기 뽑아 잘근잘근 씹는다. 산다는 건 자주 쓴맛을 보는 것이라던 선배의 말이 오늘은 옳았다.

 

 


 

 

천양희 시인 / 비오는 날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Ⅲ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천양희 시인 / 외딴 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 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천양희(千良姬, 1942 ~ )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 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했다. 1996년 소월시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11년 제26회 만해문학상, 2014년 제9회 불교문예작품상, 2017년 통영문학상 시상식 청마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