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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 / 응시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황인숙 시인 / 일용할 물
오늘은 또 어디서 머리를 적시나 어디서 가슴을 적시고 발을 적시나 오늘은 또 어디서 온몸이 젖어 뚝 뚝 물 떨구며 돌아오나 돌아와 젖은 그림자를 바람벽에 널어놓고 말려보나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中
황인숙 시인 / 자명한 산책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만약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 자명한 산책/문학과 산책/2003
황인숙 시인 / 자유로
나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구절초처럼 빛나는 혈통에 대한 간도 쓸개도 없이
멍하니 기가 죽어 살고 있다.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황인숙 시인 / 젖은 혀, 마른 혀
바람의 축축한 혀가 측백나무와 그 아래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슬며시 눈을 뜨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다
바람의 마른 혀가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깨어난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를 핥으면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는 스스로 눈을 감고 측백나무와 수수꽃다리로 잠이 든다 영혼이 펄럭이며 잘 마르는 날.
황인숙 시인 / 조용한 이웃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끔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딱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잔가지들이 무수히 많고 본줄기도 가늘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 자명한 산책/문학과 산책/2003
황인숙 시인 / 졸음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시내를 건넙니다
달팽이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유리창 위에 달팽이 한 마리. 종일토록 시내를 건넙니다.
황인숙 시인 / 주름과 균열
내 기억이 포개진 수많은 주름 속에 포개진 균열
그 단애에 헐벗은 나무가 서 있다 눈과 얼음이 따개비처럼 불가사리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기가 막히다 세월의 빠름이,아니 사실 빠른건 모르겠는데 세월의 많음이
균열이 포개진 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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